미국·중국의 패권 경쟁. 아마 2025년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일 겁니다. 최근 이를 주제로 하는 책 한 권이 출간돼 미국에서 관심을 끌고 있는데요. 제목은 ‘브레이크넥: 미래를 설계하려는 중국의 도전(Breakneck: China‘s Quest to Engineer the Future)’. 저자는 중국계 캐나다인인 단 왕(Dan Wang) 스탠퍼드대 후버역사연구소 연구원이죠.
그가 말하는 ‘변호사 사회’ 미국과 ‘엔지니어링 국가’ 중국의 극적인 대비는 꽤 흥미진진합니다. 변호사와 엔지니어가 맞붙으면 과연 누가 이길까요? 단 왕은 그 답까지 설득력 있게 제시합니다. 책 내용을 제 나름대로 요약해 봤습니다(구체적 문장 표현과 순서는 책과 다르다는 점 이해해 주세요). 그럼 ‘브레이크넥(위험할 정도로 빠르다는 뜻)’의 속도로 가보시죠.
2011년 6월 개통을 앞두고 베이징-상하이 노선 고속열차가 시험운행 하는 모습. 고속철도 건설은 ‘변호사 사회’ 미국과 ‘엔지니어링 국가’ 중국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신화통신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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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니어들은 무엇을 좋아할까요? 바로 건설이죠. 미국의 두배에 달하는 고속도로, 일본의 20배인 고속철도망, 전 세계 다른 나라를 모두 합친 것과 같은 규모의 태양광·풍력 발전. 지난 40년간 중국은 끊임없이 건설을 이어왔습니다.
2017년 10월 후진타오 전 주석과 시진핑 국가주석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 두 사람은 모두 공학을 전공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AP 뉴시스
미국 자체가 변호사 사회입니다. 미국엔 인구 10만 명당 400명의 변호사가 있죠(참고로 한국은 77명). 그리고 변호사들(특히 미국의 변호사들)은 모든 것을 막는 게 특기입니다. 절차에 집착하고, 규칙과 심사를 강화하고, 소송을 걸죠.
엔지니어링 국가와 변호사 사회의 차이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게 고속철도 건설입니다. 2008년 캘리포니아 유권자들은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를 잇는 고속철도 건설안을 승인했습니다. 같은 해 중국은 베이징-상하이 고속철도 노선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캘리포니아 고속철도 공사 현장의 모습. 고속철도 건설 자금지원안은 2008년 주민투표를 통과했지만 1단계 완공은 2030~2033년에나 이뤄질 전망이다. 캘리포니아 고속철도청 제공
중국은 너무 많이 건설해서 문제이고, 미국은 너무 안 지어서 문제입니다. 왜 미국에도 건설이 필요할까요. 풍부한 ‘물리적 역동성’이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고속도로, 편리한 대중교통, 풍부한 주택은 그 자체로 사회 불평등을 줄일 뿐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주민들에게 ‘점점 살기가 좋아지고 있어’라는 희망을 심어주죠. 1960년대 이후 미국이 건설을 멈추면서 잃어버린 게 바로 그 낙관주의입니다.
중국 공산당 선전기관은 2023년 “미래에 중국 경제가 어떻게 발전하든 중국은 항상 개발도상국(developing country)일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미국도 현상 유지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개발도상국’으로 자랑스럽게 선언할 수 있을까요.
중국의 부상을 두고 한때 미국에선 이런 평가가 파다했습니다. 하지만 ‘하드웨어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선전에 가본다면 얘기가 달라질 겁니다. 창의적인 하드웨어 엔지니어들과 전자제품 조립에 능한 수백만 명 노동력이 조합돼 혁신적인 전자 제품을 쏟아내죠.
선전을 세계적인 전자제품 생산 허브로 탈바꿈시킨 주인공은 사실 애플입니다. 미국 기업은 1990년대부터 제조시설을 중국으로 이전시키기 바빴고, 그 대표주자가 애플이니까요. 1993년 조지 부시의 수석 경제고문이던 마이클 보스킨(스탠퍼드대 경제학 교수)은 “컴퓨터 칩과 감자칩, 뭐가 다르지?”라고 농담했습니다. 당시 미국 엘리트들은 제조업을 잃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죠. 경제학자, 경영자, 월가는 노조의 해외 이전 반대를 합리성 없는 감상론으로 치부했습니다.
2014년 중국에 있는 폭스콘의 아이폰 공장을 찾은 팀쿡 애플 CEO의 모습. 애플이 중국 스마트폰 생태계에 막대한 투자를 한 덕분에 중국은 스마트폰용 카메라, 배터리, 센서, 모뎀 같은 부품의 생산을 크게 늘리고 가격을 급락시킬 수 있었다. 출처: 팀쿡 본인 SNS
그 대표 사례가 태양광 산업입니다. 미국 벨 연구소는 세계 최초의 태양전지를 발명했고, 독일 기업이 태양광 발전 장비를 생산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2010년대 중반쯤 태양광 가치사슬 전체를 제조하는 방법을 모두 터득했고, 이후 10년 동안 이 산업에 엄청난 효율 향상과 가격 하락을 이끌어왔죠. 인텔의 전설적인 전 CEO 앤디 그로브 말대로 미국이 “신화적인 창조의 순간”보다 제품의 “확장”에 집중했다면, 스토리는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미국 제조업체의 해외 이전은 제조 기술과 지식의 영구적인 손실을 의미합니다. 미국 국가핵안보국은 1980년대에 제조됐던 핵탄두용 기밀 물질 ‘포그뱅크(Fogbank)’의 생산방법을 몰라서(생산시설 폐쇄, 직원 모두 은퇴), 2008년 6900만 달러를 들여 다시 만들어야 했습니다. 실리콘 밸리는 기술의 ‘발명’에 집착하지만, 실제로는 기술은 ‘사람’과 ‘공정 지식’에 가깝습니다.
그래도 미국엔 소프트웨어, 특히 인공지능(AI) 기술이 있다고요? 미국이 AI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점은 오히려 우려됩니다. 알고리즘만으로는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으니까요. 실제로 싸우려면 드론이나 군수품이 필요하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전투용으로 사용되는 중국 DJI 드론을 보세요. 드론·스마트폰·배터리 생산에서의 중국의 장악력은 미국이 갖지 못한 것입니다.
미국의 한 농부가 중국 DJI가 만든 농업용 드론을 조종하고 있다. 미국 하원은 지난해 DJI 드론의 미국 내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AP 뉴시스
왜냐고요? ‘엔지니어링 국가’이기에 가지는 한계와 부작용이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엔지니어들이 통치하는 나라는 국민을 욕망을 가진 개개인이 아닌 조종할 수 있는 하나의 집단으로 봅니다.
-한번 숫자로 목표를 정하면 그 숫자에 종속된 채 고집스럽게 밀어붙입니다.
-정치적 논쟁 따윈 없이 과학(또는 과학이라 믿는 것)을 따릅니다. (하지만 그 근거가 되는 데이터는 엉망입니다.)
엔지니어링 국가인 중국은 때론 새로운 이론에 지나치게 열광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 자녀 정책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한 자녀 정책이 시행된 35년 동안 중국에선 무려 3억2100만 건의 낙태가 시행됐다. 이제 중국은 정책을 180도 바꿔 출산 장려에 나섰다. 하지만 공무원들이 기혼여성에게 전화 걸어 출산 계획을 묻는 방식은 과거 한 자녀 정책 때와 비슷하기도 하다. 신화통신 뉴시스
2020~2022년 이어진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도 대표적인 엔지니어적 정책의 실패 사례이죠. ‘제로’라는 숫자에 집착하느라, 이동 통제는 점점 극단적으로 변해갔고요. 결국 상하이시를 8주간 봉쇄하는 말도 안 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결국 “공산당 타도, 시진핑 퇴진!”이라는 구호가 시위대에서 터져 나왔죠.
헝다 사태로 시작된 중국의 부동산 거품 붕괴, 앤트그룹 IPO 무산을 포함한 빅테크에 대한 규제 폭풍 등. 중국 정부가 이상하게 스스로를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짓을 하는 것 역시 이런 경직된 엔지니어적 사고방식의 영향입니다. 일단 목표를 잡으면, 토론 따윈 없이 앞뒤 재지 않고 돌진하곤 하죠. 그게 완전히 틀렸다는 게 증명될 때까지.
무엇보다 중국의 가장 큰 약점은 중국 공산당이 국민을 불신하고 두려워한다는 겁니다. 창의적인 에너지가 분출하는 것, 다원주의가 꽃피우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죠.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미국은 훨씬 더 희망이 있습니다. 중국 지도부는 미국의 다원주의를 끝끝내 수용하지 않겠지만, 미국은 (어렵긴 하지만) 중국의 건설과 제조 역량을 어느 정도는 배울 수도 있으니까요. 만약 미국이 건설을 위해 기꺼이 어려운 선택도 하겠다는 ‘절박감’을 가질 수만 있다면 말이죠.
중국계 캐나다인 단 왕은 중국 전문 투자리서치회사 소속 애널리스트로 베이징에서 일하면서 중국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예일대 로스쿨을 거쳐 현재는 스탠퍼드대 후버역사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브레이크넥은 그의 첫 책이다. 단 왕 본인 SNS
‘역시 중국은 위협적이야. 미국이 이제라도 달라져야 해!’라는 이런 식의 반응. 왠지 기시감이 듭니다. 1985년 뉴욕타임스엔 아시아 전문기자 시어도어 화이트가 쓴 ‘일본으로부터의 위험(The Danger from Japan)’이란 장문의 기사가 실렸죠. 이제 미국은 중국을 마치 40년 전 일본처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에 한국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문화적 영향력이 취약한 중국과 달리 K팝과 오징어게임을 만들 수 있는 나라라는 언급 정도이죠.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생각하게 됩니다. 한국은 과연 어떤 나라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
한국은 제조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산업구조라는 점에선 엔지니어적 성격이 있긴 한데요. 정치권엔 법조인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고, 최근 6명의 대통령 중 4명이 법조인 출신이죠. 미국처럼 활력을 잃은 ‘변호사 국가’의 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경계심을 가져야 하겠는데요. 결국 성장에 대한 절박감을 놓지 않는 것, 그게 우리에게도 지금 필요해보입니다. By. 딥다이브
*이 기사는 9월 1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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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