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모래알은 암석에서부터 출발한다. 암석이 낮밤의 온도 차로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등 많은 시간을 거치면 구성 요소인 광물의 결합이 느슨해져 잘게 부서진다. 이런 알갱이들이 강을 따라 흘러 바다로 가고,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이면 다시 암석인 퇴적암이 된다. 그런 후 다시 모래알로의 여정을 시작한다. 이 주기가 200만 년쯤 된다.
작은 모래알에 담긴 이러한 오랜 내력에 비하면 제주도 동쪽 바다에 우뚝 솟은 성산일출봉의 역사는 그야말로 일천하다. 겨우(?) 5000여 년 전, 단군이 한반도 꼭대기 어디쯤 나라를 세울 때 비교적 얕은 수심에 있던 해저 화산이 분출해 지금의 봉우리를 만들었다. 반면 그 위에 있는 푸른 바다 동해가 품은 시간은 꽤 장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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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은 이렇듯 보이지 않는 시간의 산물이다. 생명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살아있는 것은 모두 그 안에 엄청난 시간을 품고 있고, 그 시간 동안 들이닥친 어려움들을 이겨냈기에 살아있다. 고 이어령 선생이 생전 “내 나이는 36억86세다”라고 말했던 건, 이러한 생명의 역사를 감안한 것이었다. 많은 과학 연구가 밝히고 있듯 지금의 나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나 이전의 생명이 살아온 총체가 바로 나 자신이다. “한 사람을 만난다는 건,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만나는 것”이라던 정현종 시인의 표현은 더할 나위 없다.
현명한 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시간이 만들어 낸 것을 볼 줄 안다. 영업 업계의 고수라 불리는 한 인사는 고객을 만날 때 고객이 좋아하는 장소를 사전에 물어 약속 장소로 정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통의 깊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생전 많은 영감을 받았다는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 속에서도 이러한 현명함을 엿볼 수 있는 표현이 있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중략)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도 분명 어떤 시간의 산물이다. 알면 다시 보이고, 이해하면 더 깊이 보인다. 보이지 않는 시간이 무엇을 만들어 낼지 모른다. 누구든 함부로 대하지 말자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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