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메두사’가 살아남으려면 ‘세상과의 불화’ 상징인 메두사… 끝내 세상 접점 못 찾은 이들은 자기 자신 향한 분노까지 키워 … 부적응자 제거만이 해결책일까 아이 위해 쇼트커트 ‘메두사 엄마’… 스스로 변화 택하면 새 삶 가능
그리스 신화 속의 괴물 ‘메두사’를 세상과 불화하는 사람, 나아가 자기 자신에게도 분노하는 사람으로 해석한 예술 작품들. 카라바조의 자화상 ‘메두사 머리’(1597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키티 크라우더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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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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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메두사’는 사자보다 날카로운 이빨과 꿈틀거리는 뱀의 머리칼을 가진 괴물이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모두 돌이 되고 만다. 영웅 페르세우스는 청동 방패에 비친 메두사를 보며 다가갔기에 메두사의 목을 벨 수 있었다. 이 메두사는 어떤 존재를 상징하는 것일까? 억압된 무의식의 상징이라는 해석부터 매력적인 여성, 분노에 찬 여성, 나아가 무의미한 우주를 직면하게 되면 모두 돌이 되어버리니까 무의미한 우주를 상징한다는 등의 해석까지 끝이 없다.》
어쩌면 메두사는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사람이 아닐까. 누구나 그의 얼굴을 보면 돌로 변한다지 않는가. 증오와 분노로 끓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 누구나 돌처럼 굳어지지 않나. 그리고 그런 경험을 반복하기 싫지 않나. 그래서 더욱 그 사람을 멀리하게 되지 않나. 자신을 점점 더 멀리하는 타인을 보며 메두사는 더욱더 증오와 분노를 키우게 된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돌이 되고 만다.
그리스 신화 속의 괴물 ‘메두사’를 세상과 불화하는 사람, 나아가 자기 자신에게도 분노하는 사람으로 해석한 예술 작품들. 홋프리트 마스의 ‘메두사의 머리’(1680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키티 크라우더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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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화해는커녕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이들도 있다. 결국 접점을 찾지 못해 자신을 유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하여 메두사 아닌 메두사가 돼버린 이들도 있다. 17세기 화가 홋프리트 마스의 작품을 보라. 메두사 머리 위에서 뱀들이 서로를 물어뜯고 있다. 세상에 대한 분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까지 얽혀 있다. 정말 괴물이 된 것이다. 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은 메두사를 죽여버리는 일이다. 그게 바로 영웅 페르세우스가 한 일이다. 그러나 메두사는 정말 죽어 마땅한 괴물인 걸까. 부적응자는 정말 사라져 마땅한 존재인 걸까.
그러나 메두사를 죽여야 꼭 세상 평화가 도래하는 것은 아니다. 키티 크라우더의 그림책 ‘메두사 엄마’(2014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키티 크라우더 홈페이지
그러나 끝내 아이는 학교에 가고 싶어 한다. “너 학교에 가고… 싶니?” 그리하여 아이는 학교에 가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지만 메두사 엄마는 학교에 방문할 수 없다. “아니, 엄마는 따라오지 말아요. 엄마를 보면 아이들이 모두 무서워해요.” 특히 그녀의 머리를 보면 누구나 두려워 얼어붙을 것이다. 자, 메두사 엄마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학교에 간 이리제를 부르는 엄마 소리가 울려퍼진다. “이리제!”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돌아본 이리제 앞에는 남들이 무서워할까 봐 머리를 짧게 자른 엄마가 서 있다. “엄마!” 남의 손에 의해 목이 잘린 메두사는 끝내 세상과의 불화 속에 죽었지만, 자기 손으로 머리카락을 자른 메두사는 이제 세상과 화해하고 세상 속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다. 잘린 머리칼은 어떻게 되었나? 예쁜 바다뱀이 되어 따뜻한 해류를 타고 북쪽 바다를 찾아갔다.
크라우더에 따르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여러모로 세상과 화해하는 일인 셈이다. 아이를 낳아 기르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타인과의 교류가 불가피하다. 아이를 세상에 내어놓은 다음에는 그 아이도 세상의 일부다. 그러니 그 아이가 살아가야 할 세상과 접점을 찾아야 한다. 세상과 접점을 찾지 못한 사람들도 때로 세상과 화해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니다. 그들은 에너지가 방전돼 양순해진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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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