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 사진 출처 국가유산청
광고 로드중
이문영 역사작가
이성계는 요동 정벌에 반대하며 그 유명한 ‘사불가론’을 들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슬러서는 안 되고, 여름에 군사를 내는 것이 불가하며, 빈틈을 노려 왜구가 침략할 것이며, 덥고 비가 와 활이 망가지고 전염병이 돌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우왕은 이성계의 말에 흔들렸으나 최영이 다시 우왕의 마음을 다잡았다. 이성계가 다시 진언하자 우왕은 반대하다가 죽임을 당한 신하를 들먹이며 이성계를 압박했다.
결국 1388년 음력 4월 18일 약 4만 명의 군이 서경에서 요동을 향해 출전했다. 최영이 팔도도통사로 최고 지휘관이었는데, 우왕이 그를 떼어놓을 수 없다 하여 최영은 군대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것은 최영의 크나큰 실책이었다. 좌군은 조민수가, 우군은 이성계가 맡았다. 조민수는 고려의 권신이었던 이인임의 친척으로 최영과 가깝다 할 수 있었지만 이성계는 줄곧 전쟁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참전이 결정됐다.
광고 로드중
최영은 국가에 세운 공이 막대하고 그 스스로 청렴결백해 흠을 찾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최영을 적으로 내세우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명나라와 전쟁을 하겠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결국 최영과 같은 편이었던 조민수가 이성계의 설득에 넘어갔다. 좌군, 우군 가릴 것 없이 군의 인심 역시 이성계 편이었다. 조민수와 이성계는 압록강 안에 있는 위화도에 도착한 뒤 두 차례나 회군을 요청했다. 물론 최영은 모두 거절했다. 이에 이성계는 회군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이다.
이성계는 회군 후 최영을 체포해 유배 보내고 우왕을 폐위시키는 등 거침없이 권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다음 왕을 옹립할 때는 조민수에게 밀려 창왕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최영을 제거했다고 안심했다가 조민수라는 암초를 만난 격이었다. 회군 때 벌써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성계는 서두르지 않았다. 회군 후 4년에 걸쳐 고려의 낡은 제도를 개혁해 새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뒤 왕위에 올랐다. 위태로울수록 치밀하게 일을 진행해야 성공할 수 있다.
이문영 역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