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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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채욱 전 CJ그룹 부회장은 사원으로 출발해 외국계 기업, 공기업, 대기업에서 모두 최고경영자(CEO)로 일한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이다. 영남대 법대를 졸업한 이 전 부회장은 사법시험을 준비하다가 1972년 삼성물산에 입사했다. 그는 생전에 일에 대한 책임을 얘기할 때 자신의 실패담을 털어놓곤 했다. 대표적 일화가 삼성물산 과장 때 사표를 썼던 감천고해(甘川苦海) 사건이다.
직을 건 이채욱과 이복현의 차이
그는 1979년 폐선을 수입해 고철로 파는 사업을 맡았다. 당시 고철용 폐선 4척이 부산 감천항에서 태풍 어빙을 만나 침몰하고 말았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했다. 그는 “배를 모두 건져 올리고 나면 회사를 떠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1년 반 동안 바닷속에서 배를 해체하고 대형 크레인으로 조각조각 건져 올렸다. 배를 모두 인양한 그는 진짜 사표를 냈다. 회사는 끝까지 최선을 다한 그에게 두바이 지사장의 중책을 다시 맡겼다. 이 부회장은 그때 힘든 기억을 잊지 않으려고 ‘甘川苦海’라는 글을 집무실 책상에 넣고 일했다고 한다. 직(職)을 건다는 건 고통을 감내하며 책임을 완수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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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을 거는 방식도 잘못됐다. 금감원은 무소불위의 기관이 아니다. 금융위나 증권선물위원회의 지도·감독을 받아 일하는 무자본 특수법인이다. 예산도 금융회사들이 검사 수수료 명목으로 갹출한 돈에서 나온다. 금융위 등 정부 부처가 상법 개정 대신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가닥을 잡았는데도 고집을 피우고 라디오에 나와 대통령까지 거론해 월권 논란을 자초했다.
정작 직을 걸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금융시장에선 검사와 감독 소홀로 금융사고가 터졌다. 이 원장은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손실, 티몬·위메프 사태, 오락가락 대출 정책 혼란에 사과했지만 공개적으로 물러나겠다고 하진 않았다. 직을 걸어야 할 일은 말로 때우고, 그렇지 않은 일엔 직을 걸면 딴 뜻을 품고 있다는 의심을 받는다.
직을 걸 의지가 있다면 진작에 해야 했다. 두 달 뒤면 끝날 임기를 걸고 ‘당신은 무엇을 걸 것이냐’는 투로 고집을 피워 빈축을 샀다. 공직을 두고 도박꾼처럼 흥정하는 건 말 한마디도 천금처럼 무거워야 할 공직자의 자세가 아니다.
두 달 뒤엔 이복현, 손 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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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장의 남은 임기 두 달은 조기 대선과 겹친다. 돌출 행보가 잦은 그가 당장 짐을 싸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미국의 상호관세 부과로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한국 수출이 13% 감소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기업 부실은 금융권으로 전이될 수 있다. 이 원장은 감천고해의 정신으로 위기관리 책임을 끝까지 완수해야 한다. 두 달 뒤 바라던 대로 손을 떼고, 말하던 대로 개업 변호사의 길로 가면 된다. 공직은 지금까지 일으킨 혼란만으로도 충분하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