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세력 주장 불과했던 부정선거 음모론 尹 가세한 뒤 보수 3분의 2가 공감하는 현실 선거 불신, 민주 질서 해치는 치명적 毒 대통령이 부추긴 혼란… 어찌 수습하려나
정용관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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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12·3 계엄 당시 계엄군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과천청사에 진입했다는 소식에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국회를 해산하고 다시 총선을 치르려고 했나” 하는 막연한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부정선거 의혹을 파헤치기 위해”라는 얘기를 듣고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이후 전개된 상황이었다. 어느 좌파 유튜버의 ‘K값 이론’, 배춧잎 투표지 논란 등 부정선거 음모론 역사는 길지만 계엄 전까지만 해도 일부 확신자나 극단 유튜버들의 주장에 불과했다. 그러더니 탄핵 국면을 거치며 부정선거 ‘음모론’은 부정선거 ‘의혹’ 수준으로 격상된 듯한 양상이다. 1월 말에서 2월 중순 여론조사들만 보더라도 부정선거 주장에 공감한다는 응답이 전체의 36∼38%, 보수 응답자 중에선 65∼68%에 달했다. 이쯤이면 보수의 주류 견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몇 해 전 한 원로 교수의 부정선거론을 사석에서 들은 적이 있다. 참석자들이 부정적 반응을 보이자 이 교수가 “나는 의심한다. 국가가 왜 나의 의심할 자유를 억압하느냐”고 열변을 토했던 일이 기억난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지만 ‘의심의 자유’ 자체는 틀린 말은 아니다. 학자에게 의심은 중요한 덕목이다. 10가지든 100가지든 의심 가는 요소를 다 올려놓고 논박하는 과정에서 사고의 틀이 넓어지고 제도 개선으로 이어진다면 긍정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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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부정선거 음모론의 서사(敍事)는 갈수록 진화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육필 원고를 통해 국내 정치세력과 국제적 연대의 협력에 의한 총체적 부정선거 시스템 가동 운운하면서다. 이 주장은 2030세대의 막연한 ‘차이나 포비아’와 맞물려 증폭되면서 혐중 정서로 확산됐다. 계엄 합리화를 위한 국가 비상사태로 부정선거를 내세우고 ‘가상의 적’을 만들어 낸 셈이다.
‘전쟁은 피를 흘리는 정치이고, 정치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는데, 이에 비유하면 ‘선거는 피눈물을 흘리는 전쟁’이다. 그만큼 승패의 결과가 가혹하다. 이런저런 꼬투리로 자신의 잘못을 감싸고 다른 이유를 찾고 싶은 심리가 생기는 건 어쩌면 본능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자신 선거로 당선됐고 선거 관리에 궁극적 책임이 있는 대통령이 앞장서 여당의 총선 참패가 이상하다며 국가의 선거 시스템 자체를 부정한다면, 이는 차원이 다른 얘기다.
보수는 계엄과 탄핵에 대한 지지와 반대에다 부정선거에 대한 입장까지 3중 분열로 갈가리 찢긴 상태다. 부정선거론은 대통령 개인의 위기 모면을 위한 전략의 일환일지는 모르지만 보수 비극의 씨앗이 될 공산이 크다. 서로 극우 음모론자, 방관자라고 삿대질하는 사람들이 ‘반(反)이재명’만으로 화학적 결합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중도층도 공감 않는다는 여론이 60∼70%에 달한다.
민주공화정의 존립 근거, 권력의 정통성에 직결되는 우리의 선거제도가 부정선거가 횡행하는 남미나 아프리카의 어떤 나라들 수준이라는 건지 답답하다. 단언컨대 부정선거는 의혹이 아니고 음모론이다. 그렇다고 국민 10명 중 3, 4명이 어떤 이유로든 부정선거 의심을 갖는다니 그냥 묵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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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