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현 산업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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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독일 과학기술기업 머크의 창립 35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당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축사를 마치자 창업자의 11대손인 프랑크 슈탕겐베르크하버캄프 가족위원회 당시 회장은 답사를 하며 “상속세를 좀 낮춰 달라”고 했다. ‘농담 반 진담 반’ 유머에 메르켈 전 총리를 포함한 참석자 900여 명 사이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사례를 보면 상속세는 13대째 가족경영을 이어오고 있는 머크에도 중요한 문제라는 걸 알 수 있다. 상속세 낼 돈을 마련하려고 주식을 팔다 보면 외부 경영권 공격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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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경영의 장점은 단기 실적에 연연하지 않고 장기적 안목으로 기업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머크는 2004년 액정표시장치(LCD) 연구 100주년을 맞았다. 머크가 액정이라는 물성(物性)을 발견한 건 1904년, LCD 시장이 개화한 건 1990년대다. 그사이 머크는 제약 사업에서 번 돈으로 LCD 연구를 이어가며 원천 기술을 확보했다.
한국 산업계엔 4대 경영까지 등장했다. 이들이 백년대계를 바라보는 연구개발을 추진하기 위해선 안정적인 승계 계획이 필요하고 이 과정에서 상속세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상속세 완화가 ‘부의 대물림’ 수단으로 변질되지 않으려면 가족경영 기업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머크가(家)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13대를 내려오며 지분을 보유한 가족은 200명을 넘었다. 하지만 이들 중 18명만 가족위원회(13명)와 파트너위원회(5명)를 통해 전문경영인을 선임하는 방식으로 경영에 관여한다. 대형 인수합병(M&A)이나 큰 틀의 전략을 바꾸는 일을 제외하면 대부분 전문경영인 결정에 맡긴다. 대신 두 위원회 회장은 최고경영진 5인과 함께 퇴사 후 5년까지 회사에 대해 무한책임을 진다.
오너가라고 해서 입사에 ‘프리패스’는 없다. 입사를 하려면 다른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뒤 고위직급에 지원하는 방법뿐이며 철저한 검증을 거쳐야 한다. 가족위원회 회장은 75세가 정년이다. 소유와 경영을 독점하려는 폐해를 없애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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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을 꿈꾸는 기업의 투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오너가의 진실성이 결합됐을 때 기업의 영속을 응원하기 위한 제도적 개편에 대한 논의가 사회적 지지를 얻을 수 있다.
강유현 산업1부 차장 yh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