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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 “정치 관심없어, 경제 살려야”… 하메네이 “문제 해결 원하면 투표를”

입력 | 2024-02-29 03:00:00

이란 히잡시위 이후 내일 첫 총선… 현지 르포
개혁파 후보자 20~30명에 불과
투표거부에 역대 최저 투표율 전망



28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 도심에 다음 달 1일 총선에 출마한 후보들의 얼굴 사진이 담긴 벽보가 붙어 있다. 이란 당국은 이번 총선을 앞두고 자격 심사를 통해 온건·개혁파 후보들의 출마를 대거 불허했다. 이에 젊은 층을 중심으로 정부에 항의하는 뜻으로 투표 거부 움직임이 일고 있다. 테헤란=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정치에 관심이 없습니다. 투표하지 않겠습니다.”

28일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만난 여대생 미나 씨(22)의 말이다. 그는 당국이 여론 통제를 위해 해외 소셜미디어에 접속하려면 가상사설망(VPN)을 구입하게 하면서 뒤로는 유력 정치인 자녀들이 VPN을 제작해 판매하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며 “배신감을 느껴 투표하기 싫다”고 했다.

다음 달 1일 이란에서는 임기 4년의 의회(마즐리스) 의원 290명,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85)의 후계자 후보군 성격이 강한 8년 임기의 국가지도자운영회의 위원 88명을 뽑는 두 개의 선거가 열린다. 중동 정세의 키를 쥔 이란에서 열리는 데다 2022년 9월 ‘히잡 의문사’로 촉발된 대규모 반정부 시위 후 치러지는 첫 전국 선거라 세계의 관심을 모은다.

그런데도 현장에서 만난 테헤란 시민의 반응은 싸늘했다. 신정일치 국가 이란에서는 헌법수호위원회의 사전 자격 심사를 통과한 이들만 출마할 수 있다. 이미 온건·개혁 인사들의 출마가 대거 금지됐고, 지원자 약 4만9000명 중 약 3분의 1인 1만5200여 명의 출마만 가능하다. 이 중에서 개혁파 후보자는 20, 30명에 불과하다.

이에 4년 전 총선과 마찬가지로 강경·보수파 후보가 대거 당선될 것이며, 경제 발전보다 반(反)서방 노선을 중시하는 현 지도부의 기조가 유지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 “먹고살기 힘든데 총선 관심 무(無)”
테헤란에서는 대형 선거 현수막이나 벽보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일부 육교와 전봇대 등에 벽보가 붙어 있지만 자세히 봐야 정보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씨에 두꺼운 옷을 입은 시민들은 선거 얘기에 손사래를 쳤다. 이들은 2018년 미국이 이란 핵 협정을 파기한 뒤 제재를 복원하며 가중된 경제난부터 해결해 달라고 입을 모았다.

도심 한복판에서 삼성 TV 등 전자제품을 판매하는 파라그 씨는 핵 개발 의혹에 따른 서방의 경제 제재로 화폐 가치는 떨어지고 생필품과 각종 가전제품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른다며 “오늘 TV를 산 사람은 며칠 후 더 비싸게 팔 수 있다”고 현 상황을 개탄했다. 경제난이 심한데 누가 선거에 관심이 있겠느냐며 “주변에서 선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시민 A 씨 또한 “지도부는 늘 ‘국산품을 사용해 제재를 이겨내자’고 주장하지만 정작 그들의 가족은 해외에서 명품 쇼핑을 즐긴다”며 “지도부의 그런 위선과 거짓말 때문에 사람들이 투표를 하지 않는다”고 강한 불만을 쏟아냈다.

당국이 발표한 월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40% 안팎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식료품 등의 물가 상승률이 140%에 달한다는 보도가 잇따른다. 높은 실업률, 낮은 임금, 휘발유 부족과 전력난도 만성화했다. 일부 시민은 “경제난에도 당국이 하마스, 헤즈볼라 등 타국 무장단체를 지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 하메네이, 투표 거부 움직임에 “적에게 놀아나”

강경·보수파 후보만 출마하는 ‘짜고 치는’ 선거에 지친 시민들은 ‘투표 거부’로 맞서고 있다. 이미 2020년 총선의 투표율은 42.8%로, 1979년 이슬람혁명 후 치러진 총선 중 가장 낮았다. 이번 총선에서는 4년 전보다 더 낮은 역대 최저 투표율을 기록할 것이란 전망이 제기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현지 여론조사를 인용해 “전체 유권자의 약 3분의 1만 투표할 것으로 보인다. 일부 지역구의 투표율은 10%대 초반을 기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선거 보이콧 조짐이 감지되자 하메네이는 18일 “선거는 이슬람공화국의 기둥”이라며 “문제 해결을 원하면 선거에 참여하라”고 투표를 독려했다. 그는 앞서 올 1월에도 “선거 기피와 낮은 투표율은 적(서방)의 손에 놀아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근 내무부는 투표율을 인위적으로 높이기 위해 유권자 수를 4년 전 약 6570만 명에서 약 6100만 명으로 470만 명 줄였다.



테헤란=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