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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정부에 걸쳐 안보보좌관-국무장관
15세 때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키신저 전 장관은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으로 꼽힌다. 1923년 독일 바이에른주에서 유대인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나치의 탄압이 심해지자 1938년 가족과 함께 미 뉴욕으로 이주했다. 당시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지만 공장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학습해 이주 2년 만에 뉴욕시립대(CUNY)에 입학했다.회계사가 되려던 그의 꿈을 바꿔놓은 것은 2차 세계대전이었다. 독일 정보수집 임무를 맡은 그는 연합군 점령지에서 나치 대원들을 색출하는 데 공을 세워 청동무공훈장을 받았다. 키신저 전기를 쓴 월터 아이잭슨은 “박해받는 유대인이었다가 20대 초반 (나치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휘두르며 키신저는 권력지향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세계관을 갖게 됐다”고 분석했다.
키신저는 1969년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하면서 본격적인 국제 외교무대에 섰다. 이후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선 1977년까지 국무장관을 지내며 약 8년에 걸쳐 세계질서를 혁명적으로 바꿨다.
키신저 전 장관은 1969년 냉전시대의 라이벌인 소련과 핵군축 협상을 시작했다. 쿠바 미사일 사태를 거치며 짙어진 핵 공포 속에 추진된 미소 데탕트는 1972년 미소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타결로 이어졌다. 1971년에는 두 차례 중국 방문을 통해 이듬해 닉슨 미 대통령과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국가주석의 첫 정상회담을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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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탈냉전을 추구한 것은 강대국 간 힘의 균형을 통한 불완전한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는 현실주의적 소신 때문이었다. 정치학자 로버트 캐플린은 키신저 전 장관을 가리켜 “미국이 펼치고 싶은 것이 아닌, 펼쳐야만 하는 외교정책을 펼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 ‘강대국 중심’ 외교에 대한 논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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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강대국 중심 외교에 대한 논란도 적지 않다. 키신저 전 장관은 남북 베트남 정전협정을 위해 민간인 50만 명의 사망으로 이어진 캄보디아 폭격을 승인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미중 데탕트를 위해 중국의 지원을 받은 파키스탄의 방글라데시 학살을 묵인했다는 비난도 받고 있다. 또 2017년에는 미국과 중국이 북한 정권 붕괴와 주한미군 철수를 맞바꾸는 ‘빅딜’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최근 하버드대에서 가진 대담에서 “상황은 언제든 쉽게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남길 유산(legacy)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말했다.
워싱턴=문병기 특파원 weappon@donga.com
윤다빈 기자 empt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