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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형준]더 이상 통하지 않는 반도체 ‘리스크 테이킹’ 효과

입력 | 2023-11-09 23:45:00

각국 정부가 안보 관점에서 반도체 지원
한국 지원은 경쟁국 대만보다 뒤떨어져



박형준 산업1부장


“혁신을 주도하면 리더가 되고, 혁신을 받아들이면 생존자가 되지만, 혁신을 거부하면 죽음을 맞는다. 많은 자리에서 저는 혁신이야말로 위기를 돌파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오늘은 혁신을 ‘리스크 테이킹’이란 단어로 바꾸겠다.”

‘미스터 반도체’라 불리며 삼성전자를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 기업으로 도약시킨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은 지난해 가을학기 연세대 강의에서 이처럼 말했다. 7주 강의를 관통하는 주제는 혁신이었는데, 그는 첫 강의에서 ‘리스크 테이킹’을 혁신만큼이나 중요하게 강조했다. 학생들에게 “리스크 테이킹을 하지 않는 화석은 되지 말라”고도 조언했다.

삼성전자가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이 된 것은 그의 말처럼 리스크 테이킹이란 모험을 감행했고 경쟁사를 압도하는 좋은 결과를 얻었던 영향이 크다. 사례 하나를 소개한다.

1983년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 선언한 삼성전자는 이듬해 세계 3번째로 64Kb(킬로비트) D램 개발에 성공했다. 당시 세계 시장을 주름잡던 일본 기업들은 견제에 나섰다. ‘후발주자 시장 진입→선행주자의 단가 인하→자금 압박으로 후발주자 퇴출→선행주자의 가격 원위치’ 형태의 치킨게임을 벌인 것이다. 1980년대 중반 D램 가격은 연일 하락했다. 1985년 64Kb D램의 생산원가는 1.7달러인데, 판매 가격은 1.3달러까지 떨어졌다. 팔수록 손해였기에 미국 인텔은 1985년 D램 사업을 포기했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는 대규모 해고를 진행했다.

삼성전자는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정했다. 오히려 차세대 제품인 256Kb D램의 공급량을 늘렸고, 그다음 세대(1Mb D램)의 선행기술 개발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역공법을 취했다. 이 전략은 1987년 들어 반도체 사이클이 다시 호황으로 접어들고 1Mb D램이 주력이 됐을 때 삼성전자를 기사회생시킨, 그야말로 신의 한 수가 됐다.

만약 반도체 사이클이 몇 년 늦게 호황기로 바뀌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삼성전자란 이름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위험을 감수한 결과는 달콤하기도 하지만 때론 치명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리스크 테이킹을 해도 위험하지 않은 시대가 됐다. 적어도 반도체 산업에선 그렇다. 지난해 3분기부터 다시 반도체 침체기가 시작돼 D램 범용제품(PC용 8Gb 2133MHz)의 평균 고정거래가격은 올 8월 1.3달러까지 내려갔다. 자금력이 약한 일부 반도체 기업은 쓰러질 법하다. 하지만 이번 반도체 불황기 때 쓰러진 반도체 기업은 적어도 메이저 업체 중에는 없다. 각국 정부가 반도체를 국가안보 차원에서 보며 전력으로 후방지원을 하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와 국회도 올해 3월 소위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을 국회 통과시키며 반도체 산업 지원에 나섰다. 하지만 미국, 일본, 대만 등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다. 본보가 한국과 대만에 각각 5000억 원씩 첨단 반도체 설비 투자를 했다고 가정하고 세금을 계산했더니 한국에선 대만보다 한 해 850억 원을 더 내야 했다. 게다가 K칩스법엔 올해 한시적으로 지원하는 조항이 많다. 내년이면 대만보다 기업 여건이 더 안 좋아지는 것이다.

10월 D램 범용제품 평균가격이 전달 대비 15% 이상 오르면서 반도체 불황의 끝이 보이고 있다. 불황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단행한 의사결정의 성적표도 곧 나올 것이다. 기업이 홀로 분투해 얻은 성적표와 정부와 기업이 2인 3각으로 달려 이룩한 성적표의 점수 차이는 클 수밖에 없다.




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