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우리 편만 ‘좋아요’ 상대편은 ‘극혐’…편협한 공감이 혐오를 낳는다[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입력 | 2023-08-26 15:00:00



우리는 왜 서로를 혐오하나(1)

공감 능력은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우리 편에게만 쏠린 편애와 과잉 공감은 나와 입장이 다른 상대 편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씨앗이 되기도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극혐’ ‘○○충(蟲)’ 같은 혐오 표현들은 꽤 불쾌하고 과격한 표현이지만, 이젠 일상용어처럼 널리 쓰인다. 누군가를 극도로 혐오하고, 벌레 취급하는 일이 잦다는 건 우리 사회에 그만큼 편가름과 차별이 심각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특히 온라인에서는 정치 이념, 성별, 인종, 종교 등이 다르다는 이유로 노골적인 혐오를 쉽게 드러낸다.

사회 전반에 공감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오히려 ‘공감 과잉’의 문제로 볼 수 있다. 관건은 공감의 방향이다. 내가 속한 ‘우리 편’에만 과한 공감이 쏠리면, 상대편에게는 차별과 혐오가 생기기 마련이다. 남성을 비하하는 ‘한남충’이나 여성을 비하하는 ‘김치녀’ 같은 혐오 표현들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철저하게 우리 편 입장만 공감하며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리다’는 사고가 공고해지면, 상대편은 ‘극혐’의 대상이 된다. 이같은 선택적 공감은 소속감을 강화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많은 적을 만들기도 한다.



더러운 것 보면 도망…생존 반응으로서의 ‘혐오’
사실 혐오감은 생존과 직결된 원초적 감정이다. 다만 원시시대 혐오의 대상은 눈, 코, 입으로 느낄 수 있는 1차원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엔 상한 음식, 동물 사체, 배설물 등을 잘못 접촉하면 감염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먼 옛날부터 오감으로 불쾌함을 감지해 혐오스러운 것들로부터 도망쳐 살아남았다.


아무거나 먹거나, 만졌다간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던 원시시대에는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것들을 피해야 생존에 유리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진화학자인 찰스 다윈은 그의 저서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서 혐오감을 공포, 슬픔, 분노 등과 같은 인간의 기본 감정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혐오스러운 것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거나, 손짓으로 공중을 휘휘 젓고, 침을 뱉거나, 토할 것 같은 입 모양을 한다. 이는 더러운 것을 뱉거나, 멀리 밀쳐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회피 반응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1980년대부터 혐오감을 연구해 온 폴 로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1차원적 혐오감을 설명한다. 그는 혐오감이란, 더러운 것이 입 안으로 넘어올 것 같은 상황에서 느끼는 불쾌감으로 정의한다.이런 정의는 도덕성과 같은 추상적인 문제에도 확대 적용된다. 우리는 도덕적, 사회적 맥락에서 판단했을 때 혐오스러운 것에 대해서도 ‘썩었다’ ‘역겹다’ ‘토 나온다’ ‘악취가 난다’ 등의 표현을 쓴다. 그 대상이 ‘오염’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때는 상한 음식이나 썩어가는 동물 사체처럼 누가 봐도 혐오스러운 게 아니라, 개인적 혹은 문화적 맥락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혐오의 기준이 생존이라는 본능적 반응이 아니라,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각자 다른 혐오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니, 의견이 다른 이들 사이에선 갈등과 분란이 일어난다.



“우린 맞고, 너흰 틀리다”…우리 편만 공감 ‘올인’
폴 로진 교수에 따르면, 혐오감은 외부의 더러운 것이 내 몸 안으로 경계를 넘어오려고 할 때 발생한다. 심지어 원래 내 몸에 있던 타액이나 대변도 일단 외부로 배출되고 나면, 나의 경계 밖으로 나간 것이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것이 된다. 철저히 내 경계 안에 있을 때만 혐오스럽지 않게 여기는 것이다.

혐오를 느끼는 경계가 우리의 육체에서 사회적 규모로 커지면 ‘내 편’과 ‘남의 편’이 나뉜다. 이때 내가 속한 내집단에 편애와 공감이 과잉 집중되고, 나와 입장이 다른 외집단은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보수와 진보, 지역주의, 남과 여의 갈등 등 많은 분야에서 혐오감이 분출되고 있는 것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여혐(여성혐오), 남혐(남성혐오) 논란이 불거지자 관련 여성단체(아래 사진)와 남성단체(위 사진)가 각각 거리로 나서 서로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동아일보 DB


폴 블룸 미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런 이유로 “공감에 반대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공감에 반대한다기보단 공감의 ‘오용’에 반대한다는 의미다. 그는 저서 ‘공감의 배신(Against empathy)’에서 “공감은 지금 여기 있는 특정 인물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스포트라이트”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공감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에게는 공감 능력이 발휘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 인종, 종교, 정치 이념, 성별 등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공감하기 시작하면, 그 반대에 있는 사람들에겐 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 심한 경우엔 전쟁을 벌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우리가 느끼는 공감 정도에 차이가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혐오는 편 가르기를 부추긴다
혐오감을 느낄수록 내집단과 외집단의 편가르기는 강화된다. 뇌의 인지 방식을 살펴보면 그 원리를 알 수 있다. 우리의 마음에는 외부에 적(혐오 대상)이 나타났을 때 내 편을 지켜야겠다는 욕구가 동시에 일어나는 작동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세미르 제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생명과학부 교수 연구팀은 흥미로운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팀은 성인 17명을 대상으로 지인 중에 혐오하는 사람, 별다른 감정이 없는 중립적인 사람의 사진을 각각 보여주면서 뇌 반응을 fMRI(기능적 자기공명영상)로 촬영했다. 실험 전에 참가자들로부터 헤어진 전 애인, 직장의 라이벌 동료 등 싫어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미리 받았다. 또 알고는 지내지만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사진도 함께 받았다.



실험에서는 4명의 얼굴을 차례로 보여주며 뇌 활동을 기록했다. 4명 중 1명은 전 남자친구 등 증오하는 사람이었고, 나머지는 알고 지내는 사이지만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 중립적인 관계였다. PLos one


싫어하는 사람 얼굴을 볼 땐 뇌에서 분노, 두려움, 공격성을 느끼거나, 공격이나 방어를 위한 신체적 운동능력을 발휘하도록 몸을 준비시키는 영역이 활성화 됐다. 혐오하는 대상을 보면 분노, 공포, 공격성이 유발된다는 의미다. 이 영역들은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는 다른 지인들의 사진을 볼 땐 활성화되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같은 뇌의 ‘증오 회로’가 사랑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회로와 상당 부분 겹친다는 점이다. 공통적으로 활성화되는 부분 가운데 하나인 뇌섬(insula)이라는 부위는 혐오스럽고 불쾌한 자극을 평가하는 곳이다. 연구팀은 “뇌섬은 혐오하는 경쟁자가 위협을 가할 때도 활성화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에 처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을 때도 활성화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즉, 뇌에서 ‘혐오스럽다’는 판단을 내리면, ‘적에게 공격태세를 갖추자’는 반응과 ‘내 편을 지키자’는 반응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과 내 편을 지키기 위한 준비가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혐오감을 느낄 땐 우리 편과 상대 편의 경계가 확실해 지는 결과를 낳는다. 상대는 공격하고, 내 편은 더 보호하는 쪽으로 말이다. 의견이 맞는 사람들만 끼리끼리 무리를 지어 더욱 공고하고 결속하게 만든다.



상대편 곤경에 처해도…“안 도와줄 것”

내집단과 외집단에 대한 선택적 공감은 일상의 많은 부분에서 일어난다. 그 결과는 꽤 냉담하다. 외집단에 속한 사람이 고통당하고 있을 때 고통에 공감하는 정도가 둔감해지고, 도우려고 하지도 않는다. 내가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을 때, 손을 뻗어 도움을 청한 대상이 하필 나를 성별, 정치 이념, 종교, 인종 등으로 차별할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이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지 않은가. 심지어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눈 앞에서 고통을 즐기기까지 한다니 섬뜩하기까지 하다.

스위스 취리히대 연구팀은 특정 지역 축구팀을 열렬히 응원하는 남성 16명을 대상으로 실험했다. 연구팀은 이들 중 같은 팀을 응원하는 사람끼리 해당 팀의 상징이 새겨진 손목 밴드를 하게 했다. 참가자들끼리는 같은 팀 팬이 누구이고, 경쟁팀 팬은 누구인지 손목 밴드를 보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내집단은 같은 축구팀을 응원하는 실험 참가자이고, 외집단은 경쟁팀을 응원하는 실험 참가자가 된다.

보다 쉬운 감정이입을 위해 축구 한일전을 생각해 보자. 실험 참가자 일부는 붉은 악마를 상징하는 빨간색 손목 밴드를, 다른 일부는 일본 축구팀을 응원하는 파란색 손목 밴드를 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스포츠 경기 응원석에서는 내집단과 외집단이 극명하게 나뉜다. 연구에 따르면, 경쟁 상대팀 응원단을 향해서는 공감 능력이 잘 발휘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을 보고도 “돕지 않겠다”고 답한 이들이 많았다. 동아일보 DB



그리고 연구팀은 각각 같은 팀을 응원하는 이들끼리 편을 나누고, 경쟁팀과 퀴즈 게임을 해서 경쟁의식을 한껏 고조시켰다. 진짜 연구는 그다음부터였다. 연구팀은 각각의 실험 참가자들이 다른 참가자가 손등에 전기 충격을 받으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지켜 보게 했다. 그리고 이때 뇌에서 일어나는 활동을 관찰하기 위해 fMRI로 촬영했다.

참가자들은 내집단 참가자가 고통받을 땐 공감과 관련된 뇌의 전측 뇌선엽이 활성화됐다. 또 이들은 내집단 참가자가 받는 전기 충격의 강도를 반반 나눠 같이 고통을 나누겠다고 나섰다. 이와 반대로 외집단 참가자가 고통받고 있는 것을 볼 땐, 공감과 관련한 뇌 활동이 눈에 띄게 감소했다. 상대방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니, 이들을 돕겠다는 의사를 밝힌 비율도 떨어졌다.

더 놀라운 대목은 외집단 참가자가 전기 충격으로 고통받을 땐 뇌의 측좌핵 부분이 활성화됐다는 것이다. 이 부위는 보상과 관련한 영역으로 도파민이 분비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과 관련돼 있다. 연구팀은 “해당 부위는 또 다른 연구에서 다른 사람의 불행으로부터 즐거움을 느낄 때도 똑같이 활성화가 관찰된 영역”이라며 “외집단 구성원이 고통받는 것을 보는 것이 뇌에서는 보상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뿌리 뽑기 어려운 사회의 혐오감이 어디에서부터 왔고, 어떤 잘못된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살펴봤습니다. 다음주 기사에서는 △진보-보수 주의자는 서로 생긴 것부터 ‘혐오스럽다’고 느낀다 △다친 시위대, 상대 정당 지지자라면 도울까? △짐승·벌레 취급…‘비인간화’가 잔혹함을 더한다 등 정치 영역에서 나타나는 혐오감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