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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한반도 운명 바꾼 그날… 기밀문서 속 美-中-蘇의 속내

입력 | 2023-08-05 01:40:00

6·25 둘러싼 주변국 복잡한 셈법… 中 학자, 정부 기록물 바탕 재구성
“태평양 진출 거점 잃은 소련… 입장 바꿔 김일성 남침 승인”
◇아시아에서의 냉전/선즈화 지음·김국헌 옮김/483쪽·4만2000원·소명출판



정전협정 체결 이후인 1953년 8월 북위 38도선을 지나가고 있는 유엔군. ‘아시아에서의 냉전’의 저자는 소련 스탈린이 마음을 바꿔 북한 김일성의 남침에 찬동한 데에는 소련군이 주둔하던 뤼순항과 다롄항을 중국에 돌려준 이후에도 극동아시아를 통한 해상 진출로를 확보하려는 셈법이 깔려 있었다고 봤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1950년 1월 30일 한반도의 운명을 바꾼 변심이 있었다. 1949년 12월 말까지만 해도 남한을 침공하려는 김일성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던 소련이 돌연 평양에 전보를 보낸 것. ‘소련은 수시로 김일성을 만날 준비가 돼 있고, 그를 도우려 한다’는 내용의 이 전보는 김일성이 6·25전쟁을 일으키도록 도운 결정적 신호로 꼽힌다.

소련의 변심에는 극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셈법이 깔려 있었다는 게 중국 화둥사범대 냉전사연구센터장인 저자의 분석이다. 스탈린이 전보를 보내기 직전인 1950년 1월 26일 중국은 소련군이 주둔하던 뤼순항과 다롄항의 주권을 2년 내 돌려달라고 소련에 요구했고, 소련은 이를 받아들이며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소련은 태평양으로 나아갈 전략적 거점 2곳을 잃었다. 이때부터 소련은 한반도 전쟁으로 인한 실보다 득이 더 크다고 봤다. 전쟁에서 이기면 한반도 동북 연안에 영향력을 확고히 해 눈치 보지 않고 태평양으로 나아갈 부동항을 유지할 수 있었다. 패하더라도 손해 볼 게 없었다.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 상태가 지속되면 중국 역시 소련군의 주둔을 원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미국과 소련, 중국의 기밀문서와 정부 기록물 등을 바탕으로 6·25전쟁을 둘러싼 주변국의 속내를 분석했다. 표면 위로 드러난 각국의 결정 이면에 숨겨진 의도를 드러내고, 그에 대한 평가를 담았다.

미국의 참전은 소련 때문이었다고 봤다. 전쟁 발발 이튿날 “북한의 남한 침공은 소련이 발동, 지원, 그리고 종용한 것”이라고 말한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의 발언에서도 엿볼 수 있다. 미국은 사회주의 진영의 우두머리인 소련을 저지하기 위해 참전했고, 실질적인 적은 소련이라고 인식했다.

저자는 미국이 소련에 대해선 정확한 판단을 내린 반면 중국에 대해선 오판했다고 지적한다. 당시 미국 정부는 수년간 전쟁을 지속해 온 중국 군대가 전쟁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여겼다.

그러나 저자는 중국이 전쟁 발발 초기부터 한반도 출병을 주동적으로 제기했다고 봤다. 1950년 7월 2일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는 로신 중국 주재 소련 대사를 만나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 군대는 인민군으로 위장해 한반도에 들어가 작전할 수 있다”고 했다. 얼마 뒤 마오쩌둥은 중국군 32만 명을 북한에 원조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전했다. 이 같은 정황을 토대로 저자는 “마오쩌둥 본인은 시종 반드시 출병해 북한을 원조해야 함을 주장했다”고 봤다. 이는 마오쩌둥이 참전에 대해 신중했지만 스탈린에게 끌려갔다는 통설과는 다른 것이다.

저자는 중국의 출병이 사회주의 진영에서 중국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 또 중국이 전쟁 초기 소기의 목적을 이뤘음에도 1951년 1월 유엔의 정전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건 오판이었다고 말한다. 중국은 정전협정 막바지인 1953년 7월 16일에도 전투를 일으켜 7월 27일 협정 체결 직전까지 국군과 유엔군 7만8000여 명을 죽거나 다치게 했다. 이 결정 역시 중국이 막대한 대가를 치렀을 뿐 아니라 중국에 대한 미국의 불신을 키우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