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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이슈/하정민]둘로 쪼개진 ‘지혜의 아홉 기둥’

입력 | 2023-07-11 23:30:00


미국 법조계의 대표적 보수 인사인 앤터닌 스캘리아 전 연방대법관(왼쪽)과 진보 성향인 루스 긴즈버그 전 대법관의 2014년 모습. 두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법의 해석 방향이 완전히 달랐음에도 남다른 우정을 유지했고 미 대법원의 권위 또한 드높였다. 게티이미지

“상대의 의견은 공격하되 사람은 공격하지 않는다.”

각각 2020년, 2016년 타계한 루스 긴즈버그 전 미국 연방대법관과 앤터닌 스캘리아 전 대법관은 이념 성향이 정반대인데도 평생 돈독한 우정을 나눴다. ‘진보 아이콘’ 긴즈버그는 “법관은 매일의 날씨가 아닌 시대의 기후를 고려해야 한다”며 사회 변화에 걸맞은 법 해석을 외쳤다. 스캘리아는 “복잡다단하게 바뀌는 세상일수록 문헌 그대로 법을 해석해야 한다”고 맞선 ‘뼛속까지 보수주의자’였다. 낙태, 동성결혼, 총기 등에 대한 의견도 ‘극과 극’이었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그런데도 둘은 가족 여행을 같이 다니고 매해 연말 긴즈버그의 집에서 가족 식사를 하며 새해를 맞을 정도로 가까웠다. 취미도 오페라로 같았다. 두 사람은 1994년 워싱턴 국립오페라단이 공연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명작 ‘낙소스의 아리아드네’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2015년엔 둘을 소재로 한 창작 오페라 ‘스캘리아/긴즈버그’까지 만들어졌다.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일이 일상인 세상에서 “우린 달라도 하나”라고 노래하는 이 작품의 울림은 상당했다.

긴즈버그가 별세하자 스캘리아의 아들 크리스는 “두 사람은 같은 것을 믿지 않는 사람 또한 사랑하는 법을 찾았다. 미국은 둘이 세운 모범을 배워야 한다”고 추모했다. 즉, 둘의 우정은 그 자체로 미국의 법치주의를 상징했다. 법의 해석이 이토록 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는데 그들이 내린 판결 또한 공명정대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확산시킨 것이다.

단순히 둘의 우정만 남달랐던 것도 아니다. 미 대법관은 서로를 ‘형제’ 또는 ‘자매’로 부른다. 신참 대법관이 선배를 존중하는 연공서열 중시 문화도 정착됐다. 법정 변론 때도 대법원장부터 시작해 서열대로 질문한다.

이랬던 미 대법원이 각종 구설에 휩싸였다. 지난달 대학 입시의 ‘소수계 우대 정책(어퍼머티브액션)’을 위헌 판결하는 과정에서 9명 중 최선임이며 보수 성향인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과 지난해 대법원에 온 진보 커탄지 잭슨 대법관은 서로의 실명을 거론하며 날 선 공방을 벌였다. 대법관끼리의 실명 공방 자체가 이례적인 데다 둘의 나이, 대법관 경력 또한 수십 년의 차이가 났기에 미 사회가 깜짝 놀랐다.

지난해 1월에는 진보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과 보수 닐 고서치 대법관이 고서치 대법관의 마스크 미착용을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는 보도가 나왔다. 둘은 불화설을 부인했지만 소식을 전한 매체는 황색 언론이 아닌 공영 라디오 NPR이었다. 같은 해 6월 대법원이 낙태권을 폐기했을 때는 판결 초안문이 유출되는 대법원 사상 최악의 보안 사고도 발생했다.

최종심 역할만 하는 다른 나라 대법원과 달리 미 대법원은 헌법재판소의 기능까지 겸하는 데다 대법관이 종신직이어서 상상 이상의 권위와 영향력을 지닌다. 세계 최고 권력자인 미 대통령은 길어야 8년이지만 대법관은 수십 년 재직할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임명한 고서치, 브렛 캐버노, 에이미 배럿 대법관은 물론이고 조 바이든 대통령이 발탁한 잭슨 대법관은 모두 50대다. 대법원 입성이 몇 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적지 않은 설화에 휩싸인 이들의 튀는 행보가 30∼40년간 계속될 수 있다는 뜻이다.

미 대법관을 지혜의 아홉 기둥, 9명의 현자(賢者)로 부르고 종신 임기까지 보장하는 것은 자신을 발탁해준 사람 혹은 현재 백악관 주인에 관계없이 법과 양심에 따라 공명정대한 판결을 내리라는 뜻에서일 것이다. 2000년 미 대선의 승자를 사실상 대법원이 결정한 것 또한 대법관 9명 모두가 깊은 통찰과 철학으로 시대정신을 반영한 판결을 내린다는 미 사회의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미 대법원이 제시한 방향성이 싫든 좋든 나머지 세계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최근 대법원의 분열 양상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