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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은 비인간적이지만… ‘고시3관왕’ 김관영 지사의 대학 시절 별명은 ‘스트립’[황형준의 법정모독]

입력 | 2023-06-29 14:00:00

[24화]




2022년 8월 김관영 전북도지사가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DB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 학창시절에 꼭 그런 친구가 있다. 노는 것도 잘 놀면서 공부도 잘한다. 경쟁자를 의식해 공부 안 한 척 안심시키고 몰래 공부하는 ‘No 재수’도 아니다. 콩 한 쪽도 나눠 먹지 화장실에서 몰래 초코파이를 까먹는 ‘이등병’도 아니었을 것이다. 반장은 고3 때 1번 맡았지만 오락부장은 늘 맡았다.

누구나에게나 진심으로 대해 주기 때문에 여야를 떠나 적(敵)이 없다. 친화력이 있고 무엇보다 소탈하고 인간적이다. 최연소 공인회계사시험 합격을 포함해 행정고시, 사법시험 등 고시3관왕 스펙(spec)이 비인간적일 뿐….

김관영 전북도지사(이하 김관영)는 늘 웃는 상이다. 실패를 겪어도 자신감이 있다. 아무리 수재여도 하나도 통과하기 어려운 고시를 3개나 패스한 경험이 그의 자산인 것이다. 2011년 펴낸 책 ‘저를 만나면 즐거우시죠?’라는 제목도 자신감이 넘친다. 누구든 행복 바이러스로 즐겁게 해줄 자신이 있다는 거 아닌가.


● 6남 중 5남…‘리어카에서 태어날 뻔했던 아이’


“참말이지, 관영이 너는 리어카에서 나오는 줄 알았어야.”
1969년 전북 군산시 학당군(당시 지명은 옥구군 회현면 학당리)에서 6남 중 5남으로 태어난 김관영은 어머니로부터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채소 장사를 하던 어머니가 산통을 느끼고 귀가하던 중 진통이 시작됐다. 버스 정류장 앞 가게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해 리어카에 실려 집에 온 뒤 무사히 자택에서 그를 출산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농사일을 했고 시장에서 소매로 채소 등을 팔았다.

김관영도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거들었다. 오이 심고 농약 주고 가지 심고, 배추 다듬고, 마늘 심고 생강 심고… 일 년 내내 농사는 이어졌다. 아버지는 공부를 하기 싫으면 나랑 같이 농사짓자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어린 마음에도 농사는 너무 힘들고 이문이 별로 남지 않는 일이라 그 말이 무서웠다고 한다.

아들만 6명인 형제들은 용감했다. 싸움을 하건 농사일을 하건 단결 하나는 끝내줬다고 한다. 형들은 동생들이 공부할 수 있게 도와줬고 희생했다. 형제들 사이에서 정치와 사회를 배웠다.

김관영이 천재는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형들로부터 “야, 우리 집에 너같이 공부 못한 사람은 없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열심히 해서 240명 중 3등으로 졸업했다. 군산제일고에도 전교 18등 정도로 입학했지만 점점 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대입 학력고사를 예상보다 잘 못 보았지만 아버지는 재수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큰형의 조언으로 이과에서 문과로 바꿔 성균관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1987년 대학교 1학년 때 열심히 데모에 참석하며 화염병을 던지는 등 ‘열혈청년’으로 지냈다. 6월 민주항쟁으로 6·29선언이 이어지자 큰형은 여름에 “시골 부모님 생각하고 네 자신도 생각하면서 공부를 좀 해라”라며 상업부기 학원 수강증을 끊어줬다. 2학기부터 성균관대 고시반에 들어가 회계사 시험을 준비했다.

그는 경제학 등을 공부하며 재미를 느꼈다. 다음 해 4월 치러진 1차 시험에서 객관식 문제가 굉장히 쉽게 나왔다. 1차 합격자 발표가 6월이고 8월 2차 시험 예정이었는데, 그는 그때까지도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1차 시험 준비를 다시 하고 있었다. 그런데 덜컥 합격했고 11월 최종합격자 발표에서 230명 중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다. 성대 고시반에서 2학년이 합격한 것도 처음인 데다, 학교를 일찍 들어간 김관영은 만 18세 최연소 합격자로 소개됐다. 그는 이 과정에서 “시험장에서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시험 준비할 때 나는 무조건 된다고 생각하고 공부를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 비인간적 스펙…김관영의 공부법

2011년 발간한 김관영의 자서전. 



“공부와 관련된 일반 원칙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중력’을 높이는 것이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는 결국 집중력의 차이다.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첫째, ‘동기 부여’가 중요하다. 가난과 역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새로운 도전의 기회로 삼는다는 정신, ‘헝그리 정신’ 같은 것이다. 집중력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실천력을 기르는 것이다. 실천력은 ‘성공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중략) 내가 개발한 나만의 학습법은 ‘나만의 책’ 만들기이다. 요즘은 이런 식의 학습법을 ‘단권화’ 작업, ‘오답 노트’ 만들기라고 하면서 장려하는 것을 보면, 그 효과가 검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관영, ‘저를 만나면 즐거우시죠?’ 중에서

재학 중에 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김관영은 지도교수로부터 행정고시를 준비하라는 조언을 받고 다시 행정고시반에 들어갔다. 다시 한번 최연소 합격을 하겠다는 욕심이 있었지만 1차에서 2번 떨어졌다. 3년 9개월 동안 고시반에 있으면서 결국 1992년 10월 합격했다.

대학이랑 대학원을 다닐 때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시 공부를 했다. 교사를 꿈꾸던 아내를 만나서 내조를 받았고 1995년 4월 회계장교로 입대하기 전에 결혼식을 올렸다.

원래 사법시험을 볼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에 배치되고 보니 법안을 만드는 과정이 재밌었다. 마침 군대에서 오후 5시 퇴근 후 저녁시간을 낼 수 있어 법 공부를 시작했다. ‘이렇게 할 바에야 제대로 하자’는 생각이 들어서 아예 고시를 목표로 공부를 시작했다. 두 번의 낙방 끝에 군대 마치기 직전인 1998년 1차 시험에 합격했다. 재정경제부에 복직한 뒤 공부 시간 확보를 위해 정부과천청사 옆에 고시원을 얻어 ‘주경야독’을 했다.

1999년 사법시험 합격 당시 김관영과 동생 김형완 씨. 동아일보DB

형을 따라 성균관대에 입학한 김관영의 막냇동생이 함께 사법시험 공부를 하며 자료 등 도움을 줬다. 형제는 나란히 1999년 합격해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같은 대학을 나온 형제가 나란히 사법고시 2차에 합격했다. 주인공은 김관영(金寬永·31) 형완(炯完·26) 씨 형제. 특히 형 관영 씨는 88년 공인회계사자격증(CPA), 92년 행정고시 합격에 이어 ‘고시 3관왕’에 올랐다. 그는 현재 재경부 감사담당관실에 근무하고 있다. 전북 옥구군 회현면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김 씨 형제의 부모는 무엇보다 형제애를 강조했다. 이 때문에 이들 형제는 이번 합격이 너무나 기쁘다고 말했다. 이들 형제는 성균관대 동문으로 각각 경영학과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형제는 이 대학 사법고시 준비반인 ‘양현관’에서 함께 시험 준비를 했다. 동생은 낮에 자료를 정리해 퇴근 후 양현관을 찾은 형에게 줬고 형은 슬럼프에 빠진 동생을 격려했다. 이들 형제는 23일 면접만 남겨놓아 사실상 합격한 상태. 관영 씨는 재경부에서 계속 근무할 예정이며 형완 씨는 판사나 검사를 희망하고 있다.”
                                                                                    ―1999년 11월 10일자 동아일보
그 스스로 본인이 머리가 좋거나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다고 여긴다. 중학교 시절 IQ 테스트 결과도 113이었다. 대신 그는 남들보다 강한 인내심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는 “내가 마땅히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은 그러니까, 세 개의 합격증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기울였던 나의 ‘열심’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 대학 별명은 ‘스트립’…‘가장 김앤장 같지 않은 변호사’로 불려
공부도 공부지만 그는 놀기도 잘 놀고 무대 체질이었다. 노래를 잘했고 중학교 소풍 때 장기자랑으로 시골 약장사 촌극을 벌였다. 대학교 1학년 때 엠티 장기자랑에서 4학년 선배의 ‘픽업’으로 스트립쇼를 연출해서 별명이 ‘스트립’으로 불렸다고 했다. 대학원 신입생 환영회 때도 어김없이 장기자랑에 나서 노래를 불렀고 심봉사 연기를 해 박수를 받았다. 중앙공무원교육원 시절엔 자치회 기획부장을 맡아 오락부장 역할을 했고 인기가 많았다.

사법연수원에 있는 동안 김앤장법률사무소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당초 공무원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된다는 생각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당시 그는 나중에 뜻 있는 사람들을 모아 나라에서 할 수 없는 사업에 자원을 분배하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같은 자선사업을 생각하고 있었다.

회계사 자격증과 재경부 재직 경험 및 인맥 등은 변호사로서 큰 장점이었다. 인재들이 모인 김앤장에서도 김관영은 잘나갔다. 소탈함과 솔직함, 성실성은 그의 품성이었고 김앤장의 제1원칙인 ‘고객중심주의’에도 잘 부합했다. 그러면서도 겸손한 호감형이었다. ‘가장 김앤장 같지 않은 변호사’라는 별명도 붙었다.

그의 좌우명은 ‘지경을 넓히는 삶’, 즉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이다. 기독교인인 그는 ‘야베스의 기도’라는 기도문을 좋아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표현이라고 한다. 이를 위해 그는 정치인이 돼 지금보다 더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김앤장에서 근무한 지 10년 만이었다.


● 차세대 리더로 주목…제3당 원내대표 지내

2013년 민주당 수석대변인 시절 김관영. 동아일보DB

고향인 군산에서 출마한 김관영은 2012년 4월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전북 군산에서 당선됐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당 기준으로 청년(45세)이었다. 그는 ‘고시 3관왕’이라는 ‘간판’으로 인해 주목을 받았고 당 비상대책위원과 수석대변인, 대표 비서실장 등 요직을 차지했다. 주목받는 초선 의원이자 차세대 리더로 불렸다.

물론 실력이 드러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19대 국회 전반기엔 국토교통위원으로 활동하다 후반기엔 기재부 출신의 장점을 살려 기획재정위원으로 활동했다. 2014년 12월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이 추진하던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 표결을 앞두고 반대토론에 나섰다. 중소기업의 가업상속공제 적용 요건을 낮춰 경제 활성화를 꾀하겠다는 게 당시 여당 입장이었다.

하지만 김관영은 “대한민국에 전통 있는 명문 가족기업을 육성해서 지속적으로 고용과 성장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정부의 취지에 100% 동의한다”면서도 “그 방법이 기업을 하는 부자들에게 그냥 수백억 원의 세금을 면제해주는 방식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여야가 합의한 사안임에도 김관영의 반대토론 이후 여당 내 기권표가 늘면서 결국 부결됐다.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이 민주당에 있던 시절 그를 따라 국민의당으로 옮겼다. 그는 2016년 20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박지원 원내대표 체제에서 원내수석부대표를 맡은 김관영은 20대 국회에서 여야 협상 창구를 맡으며 제3당의 존재감을 보여줬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이 시작되자 탄핵소추위원을 맡았다.

당시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대선에서 패배한 뒤 유승민 의원이 창당한 바른정당과 합당하면서 바른미래당 소속이 됐다. 김관영은 재선 의원으로선 드물게 바른미래당에서 원내대표에 당선됐다. 2019년 4월 선거제 개편과 공수처 설치법 등의 패스트트랙 지정 논란에 중심에 서기도 했다.

바른미래당이 내분으로 당이 깨지면서 2020년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결국 낙선했다. 그 뒤 싱크탱크인 한국공공정책전략연구소(KIPPS·킵스)를 설립해 김성식 채이배 전 의원 등과 함께 여야를 뛰어넘는 공동의 정책 어젠다를 만들었다.

2022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에 복당했고 같은 해 6월 지방선거에서 전북도지사에 당선됐다.


● MB의 청계천처럼 새만금은 김관영의 브랜드… 친기업 성향 비판도

전북도 제공

그는 워커홀릭이다. 김앤장법률사무소에 있으면서 하루 14시간씩 일했고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도 8년 동안 지역구인 전북 군산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 매일 오전 6시에 경기 성남시 분당구 자택에서 출근을 했다고 한다. 도지사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일 자체가 재밌고 일을 즐길 줄 아는 것이다. 본인이 즐거우니 그를 만나는 사람도 즐거울 수밖에 없다.

몇 달 전 김관영에게 행정(도지사)과 정치(국회의원) 중 어떤 게 더 재밌냐고 물어봤다.


“일단 행정이 더 재밌지, 지금은 도지사인데… 왜냐하면 여기는 이제 내가 얘기를 하면 집행이 되잖아 그 변화가 즉각 있잖아. 그리고 일주일 후에 보고를 하잖아. 내가 강조하는 게 ‘한 번 지시, 세 번 점검’이야. 내가 보고받을 때 ‘이렇게 이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보고를 받은 뒤부터 내가 세 번 점검하는 것. 하겠다라는 계획에 대한 보고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받을 수 있어. 그러나 점검이 더 중요해.”
                                                                                                                         ―취재 메모 중 
김관영에게 새만금 개발사업은 정치의 시작이자 끝이다. 새만금 개발의 성패에 따라 그의 미래도 달렸다. 2013년 새만금청이 설립될 때부터 지역구 의원으로 도레이첨단소재 등 해외 기업 유치에 나섰다. 2013년 이후 9년 동안 새만금 투자 유치 규모가 1조5000억 원에 불과했지만 김관영은 7월 취임 이후 6월 말까지 60개 기업과 투자협약을 체결해 7조1000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발로 뛰고 해외 기업인들을 직접 만나 투자를 설득한 결과다.

그는 야당 재선 의원 당시 새만금에 카지노복합리조트 건설을 추진하기 위해 새만금 내국인 카지노 허용 법안을 내기도 했지만 야당과 시민단체 등의 반대가 거세 좌절된 상태다.

이런 점 때문에 일각에선 그를 향해 엘리트 출신, 김앤장 출신답게 지나치게 친기업적이라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김관영이 추구하는 건 무엇보다 실용이다. 그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강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정치적 스승으로 삼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미 이미 정치와 행정이 이끄는 사회가 아니다. 나는 경제인이 이끈다고 봐요. 공직자들의 월급이 어디서 나오냐. 다 세금 걷어야 나온다. 법인세 부가가치세 소득세 등 3개가 국세의 80%인데 이 3개는 철저하게 기업 활동과 관련해서 나온 것이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가 고도화됐기 때문에 결국 기업인들이 대한민국을 이끌어 간다. 그러면 정치인의 롤은 뭐냐. 우리 기업인들이 국제적 글로벌 경쟁에서 뒤지지 않도록, 그 사람들이 너무나 뒤처지지 않도록 빨리빨리 제도 개선을 해서 뒷받침하는 것이 나는 정치와 행정의 역할이라고 본다. 특히 한국은 수출 경제이고 글로벌 경제에서 살아남아야 되기 때문에 글로벌 경제에 뒤지지 않도록 제도를 정치와 행정이 뒷받침해주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
                                                                                                                       ―취재 메모 중


● 여당과 협치의 협치 행보로 주목… 전북 국가예산 9조 원 시대 열여

2013년 12월 당시 민주당 대표였던 김한길 위원장과 김관영 당시 수석대변인. 동아일보DB


김관영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정치인은 김한길 위원장이다. 김 위원장이 민주당 대표였던 시절 그를 수석대변인과 비서실장 등으로 중용했다. 김관영은 그를 보며 정치를 배웠다.

김 위원장 측이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여러 차례 함께 윤석열 대통령을 돕자는 제안을 했지만 그는 “국민의힘으로 갈 경우 군산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가능성이 높고 나중에 퇴임하고 나서 지역에 있는 친구들하고 편하게 소주 한잔, 막걸리 한잔 마시기가 어려운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 완곡히 거절했다고 한다.

김한길계로 불렸지만 그다음 당 대표였던 문재인 대통령도 그를 아꼈고 마지막까지 국민의당으로의 탈당을 만류했다. 안철수 의원도 그를 좋아해서 ‘초선 원내대표’로 내세우자는 말까지 한 적이 있다.

도지사가 되고 나서도 윤석열 정부, 국민의힘과 협치를 통해 보조를 맞추고 있다. 국민의힘 전북도당 사무처장 출신인 박성태 씨를 3급 정책협력관 직위에 임명했고, 김 지사는 도·정협의회를 전북도-민주당이 아닌 전북도-국민의힘-민주당으로 바꿨다. 여야 협치 결과 김관영은 사상 처음으로 전북도 예산 9조 원 시대를 따내는 성과도 냈다.

지난해 12월엔 윤 대통령과 시도지사협의회 임원들하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2023년 8월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개최와 관련해 60억 원 특별교부세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더니 윤석열 대통령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예산을 한 푼도 깎지 말고 다 도와줘라”라고 했다고 한다. 김관영이 잼버리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자 윤 대통령이 “내가 옛날에 보이스카웃을 했다”며 관심을 갖고 호응을 해줬다는 것이다. 예산 지원은 물론 잼버리 조직위원장에도 행안부 장관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포함시켰다고 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듯이 김관영이 윤 대통령의 신뢰를 받고 환심을 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같은 일이 전해지자 다른 시도지사가 “왜 전북만 챙겨주냐. 우리도 챙겨달라”고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김관영의 정치에는 재미와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는 철학이 깔려 있다. 그 스스로 ‘치어리더’를 자청하는 이유다.


“우리 삶에서 원래 힘들고 지루했던 일을 그 자체로 재미있고 즐거운 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정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정치 지도자라면 그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유능한 ‘치어리더’를 자청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중략) 하지만 결국 ‘진심은 통한다’는 것이 나의 인간관계 지론이다. ”
                                                                 ―김관영, ‘저를 만나면 즐거우시죠?’ 중에서



2014년 민주당 수석대변인이던 김관영 전북도지사를 처음 만났습니다. 이후 ‘저를 만나면 즐거우시죠?’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뒤 “오늘은 저를 어떻게 즐겁게 해주실 거냐”고 묻곤 했었습니다.

정치는 성적순이 아닙니다. 하지만 공부할 때 체득한 성실함과 열정으로 정치를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 김 지사의 최대 장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김관영의 ‘즐거운 정치’가 국민들을 좀 더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어주길 기대해봅니다.

54세, ‘도백’으로 성장한 그는 이제 차세대 주자로 꼽힙니다. 주변에서 2027년 대선 도전을 권유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새만금 개발이 그의 정치적 브랜드로 자리 잡을지, 당내 주자들의 역학관계에 따라 결정될 것 같습니다.

다만 낮은 인지도와 당내 세력 부재 등도 그가 넘어야 할 벽입니다. 여지껏 서울시장을 제외하곤 광역단체장 중에 대권을 잡은 인물은 없습니다. 중앙 무대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지방정치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다음 법정모독 [25화]는 7월 13일 공개될 예정입니다. 여권의 유력 정치인에 대해 쓸 예정입니다. 참고로 [25화]를 마지막으로 법정모독 연재를 마칩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