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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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웠던 한국 민주화운동에 비하면, 일본의 민주주의는 뭔가 미적지근한 느낌이라는 분들이 많다. 소리 내어 민주주의를 외치지도 않고, 광장에 잘 모이지도 않는다고 말이다. 하긴 일본의 데모 풍경을 보면 지나치게 질서정연하고, 구호 소리는 나른하기까지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의 민주화운동도 뜨거웠던 때가 있었다. 바로 메이지 유신(1868년) 직후 벌어진 자유민권운동 시기에 그랬다. 오늘부터 이 칼럼은 20세기만이 아니라 전 일본사를 대상으로 한다.》
헌법제정과 국회개설 요구 커져
메이지 유신으로 탄생한 정권은 도쿠가와 가문만 배제했을 뿐 수구파, 온건개혁파, 급진개혁파 등 잡다한 세력을 포함하고 있었다. 급진개혁파는 폐번치현(廢藩置縣) 쿠데타(1871년)를 통해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그러나 내분은 계속됐다. 이번에는 정한론을 둘러싸고 급진개혁파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졌다(정한론 정변·1873년). 패배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정한파를 이끌고 고향 가고시마로 물러났고, 정부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장악했다. ‘오쿠보 독재’의 등장이다. 그런데 정한론을 주장했던, 도사번(土佐藩) 출신의 일부 세력은 돌연 ‘국회 설립’을 주장하는 건백서를 내며 정부를 공격했다. ‘오쿠보 독재’는 출범하자마자 양쪽으로부터 협공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국회 설립 건백서(1874년)를 계기로 일본 전역에서 정치단체가 폭발적으로 결성되기 시작했다. 1874년에서 1890년 사이에 2055개의 정치결사가 생겨났다고 하니 가히 ‘결사(結社)의 시대’였다. 막말기(幕末期·도쿠가와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유신에 이르는 기간 동안 왕성했던 정치 에네르기가 신생 정권의 추이를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분출한 것이다. 이들은 자유와 민권을 부르짖으며, 이를 보장해줄 헌법 제정과 국회 개설을 강하게 요구했다. 이를 ‘자유민권운동’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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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과 연설회 통해 반정부 활동
1880년대 전후 일본 자유민권운동의 주요 수단이었던 연설회를 그린 삽화. 연설회에서는 연설자의 발언 수위를 통제하려는 경찰과 반정부 성향의 청중이 종종 마찰을 빚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이 일본의 초기 민주화운동은 주로 헌법 초안 논의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그래서 어떤 연구자는 이를 두고 ‘헌법 창출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1889년 대일본제국 헌법 제정 때까지 94종의 헌법 초안이 만들어졌는데, 그중에는 개인이 만든 것도 있었고, ‘오일시헌법(五日市憲法)’처럼 촌락민들이 헌법연구회 같은 모임을 만들어 높은 수준의 초안을 제출한 경우도 있었다. 이 헌법 초안은 지방자치권의 불가침성과 행정부에 대한 입법부의 우위를 주장했다. 유명한 사상가 우에키 에모리(植木枝盛)가 기초한 ‘일본국국헌안(日本國國憲案)’은 정부의 압제에 인민은 무기를 들고 저항해 정부를 타도할 수 있다는 저항권·혁명권을 명시했다. 우에키는 또 일본을 70주 정도로 나눠 연방국가로 해서 각 주의 자유독립과 독자의 군대 설치를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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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요구보다 후퇴한 ‘대일본제국헌법’
저널리스트 미야타케 가이코쓰가 1889년 반포된 ‘대일본제국헌법’을 풍자한 그림. 헌법을 하사하는 천황을 해골로 그려 헌법에 대한 불만을 표했다. 미야타케는 불경죄로 3년 반 수감 생활을 했다. 사진 출처 가와카미 무라사 통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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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