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 토끼’로 부커상 최종후보 오른 정보라의 미발표 등단작 ‘호’ 출간 15년전 외할머니 뇌출혈때 간병… 함께 보던 ‘전설의 고향’ 떠올라 구미호 설화, 로맨스로 각색 “독자에게 어떻게 읽힐지 궁금”
서울 종로구 청계천에서 14일 만난 정보라 작가는 “지난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뒤 출간, 번역 제안은 물론이고 각종 행사에 초청받는 일이 많아졌다”며 “올해는 여러 해외 문학 축제에 참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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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내려달란 말이야!”
한강을 달리는 심야버스 안. 취객이 기사를 협박하며 난동을 부린다. 승객인 기준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불안해한다.
그때 한 여자가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기준에게 다가온다. 여자는 작은 치약 통처럼 생긴 플라스틱 튜브를 건네며 “이걸 짜서 아저씨 코에다 바르라”고 한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하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시키는 대로 한다. 그러자 아저씨가 갑자기 가장 가까운 좌석으로 빨려 들어가듯 앉는다. 머리카락이라고 생각했던 건 9개의 꼬리고 여자는 요술을 쓰는 여우였던 것. 기준은 홀리듯 구미호와 사랑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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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14일 만난 정 작가에게 정말 사랑 이야기를 쓴 게 맞냐고 묻자 그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연애란 게 원래 그런 거 아니에요? 깔깔 웃다가도, 갑자기 등골이 서늘한 거요. 독자 생각은 모르겠지만 전 진짜 로맨스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하하.”
그가 처음 ‘호’를 쓴 건 15년 전이다. 2008년 외할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졌고 당시 러시아에 머물던 그는 급히 귀국했다. 외할머니를 돌보던 그는 어릴 적 자신을 키워준 외할머니와 ‘전설의 고향’ 구미호 편을 보던 기억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공포 설화를 현대적인 로맨스로 바꿔 쓰면 어떨까 싶었다. 외할머니가 눈을 뜨길 바라는 마음도 담고 싶었다. 학원 강사인 기준과 구미호의 결혼을 반대하는 할머니가 쓰러지고, 할머니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기준이 고군분투하는 서사는 그렇게 탄생했다.
“외할머니 사망신고도 제가 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죠. 소설 속에서나마 외할머니가 퇴원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썼던 만큼 제겐 애틋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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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박사(미국 인디애나대 슬라브 문학) 논문을 써야 했고, 여러 장르문학 잡지에 단편소설을 기고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미출간이 크게 아쉽지는 않았어요. ‘호’가 15년 만에 발표되는 만큼 꼼꼼히 고쳤는데 독자들이 어떻게 읽을지 궁금하네요.”
정 작가는 지난해 단편소설집 ‘저주 토끼’(Cursed Bunny·래빗홀)가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며 주목받았다. 부커상은 노벨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올해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에 천명관 작가(59)의 ‘고래’(문학동네)가 올랐다. 이에 대한 의미를 묻자 그는 곰곰이 생각한 후 답했다.
“2년 연속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후보에 한국 작가가 선정될지 몰랐어요. 한국 문학의 품질이 일정 수준 보장된다는 의미 아닐까요.”
그는 집필과 번역 작업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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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