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이 그린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 멀리서 바라본 필운대 꽃놀이 장면(흰색 원 안)을 그렸다. 간송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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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종 제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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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전국 방방곡곡에서 꽃놀이 소식이 들려온다. 매화 축제부터 시작해 벚꽃축제에 이르면 전국이 들썩인다. 여름에도 가을에도 아름다운 꽃들은 피지만 유독 꽃놀이는 봄과 손을 잡는데, 이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조선 후기 각종 사료 속에 등장하는 꽃놀이의 역사를 소개한다.
사람의 마음을 탐닉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금기시되던 꽃에 대한 애호는 18세기에 들어 한양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다. ‘화유(花遊)·심화(尋花)·간화(看花)·상화(賞花)·화회(花會)·화사(花事)·심방(尋芳)·답화(踏花)·완화(玩花)’ 등 꽃놀이를 뜻하는 다양한 용어가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현상을 반영한다. 그래서인지 유독 이 시기 꽃놀이에 대한 내용이 각종 문헌에 많이 등장한다.
조선 시대 왕실과 일반 대중이 즐기던 꽃놀이 문화는 다소 차이가 있다. 우선 정조가 사랑했던 세심대(洗心臺)는 대표적인 왕실 꽃놀이 장소다. 인왕산 기슭에 있었던 세심대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꽃나무가 많아 봄날 꽃을 감상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고 한다. 박문수는 사도세자가 태어났을 때 이곳에서 만발한 꽃들을 보며 축하의 시를 지었고, 정조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에 들러 꽃놀이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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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이 그린 ‘세심대(洗心臺)’. 조선 후기 왕실 꽃놀이의 중심으로, 정조가 특히 즐겨 찾았다. 공아트스페이스본 소장
필운대에서 꽃놀이하는 장면을 그린 임득명의 ‘등고상화(登高賞花)’. 삼성출판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 문인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꽃놀이 장소는 ‘도화동(桃花洞)’이었다. 도화동은 혜화문 밖 북쪽(지금의 성북동 일대)에 있었는데, 동 가운데 복숭아나무를 벌여 심어서 복사꽃이 한창 피면 한양 사람들이 다투어 나가서 놀며 꽃놀이를 했다. 이곳 꽃놀이 풍경은 연암 박지원이 지은 ‘도화동시축발(桃花洞詩軸跋)’에 재미있게 묘사돼 있다. 한 친구는 술에 취하여 나귀를 거꾸로 타고 소나무 사이로 어지러이 달렸고, 김사희(金思羲) 등은 좌우에서 소리치고 둘러싸서 웃고 즐겼으며, 이덕무와 유득공 또한 크게 취하여 너털웃음을 그칠 줄을 몰랐다. 술을 실컷 마시고 크게 취했고 즐거움이 극에 달했다. 그러나 연암은 이러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도 질탕하게 복사꽃 밑에서 머물며 자는 이가 없음을 탄식하기도 하였다. 필운대와 도화동은 봄날 꽃놀이로 유명했던 한양의 명승지였다.
이처럼 봄날 꽃놀이는 왕실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의 한 풍경으로 자리를 잡는다. 심지어 편지 교본서인 ‘간식유편(簡式類編)’과 ‘징보언간독’에는 놀랍게도 꽃을 감상하거나 꽃놀이에 초대하는 편지와 이에 대한 답장의 양식이 실려 있다. 고전소설 속에서도 꽃놀이 장면이 삽입되어 서사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배비장전’이 대표적이다. 한라산 중턱에 방선문(訪仙門)에서는 봄마다 철쭉꽃이 기암절벽 사이사이를 붉게 물들인다. 이 모습은 제주 영주십경(瀛州十景) 중 제3경인 ‘영구춘화(瀛邱春花)’로, 제주로 부임한 관리들과 문인들은 봄이면 이곳을 찾아 꽃놀이에 빠져든다. 고전소설 ‘배비장전’은 꽃놀이 가는 장면을 소재로 서사의 결정적 장면을 연출한다.
심지어 수학 교과서에서조차 봄꽃놀이가 등장하는데, 1718년에 쓰인 대표적인 산학서(算學書)인 ‘주서관견(籌書管見)’에는 꽃놀이를 예로 들어 수학 문제를 만들어 실어 놓았다. ‘술을 가지고 봄꽃놀이를 간다. 친구들이 원래 술을 두 배로 하여 꽃놀이를 가는데 3두 4승을 마셨다. 친구들이 만나서 연이어 4차에 걸쳐 꽃놀이를 가니, 술이 다하고 대는 비었다. 원래의 술의 양은 얼마인가?’ 답은 소수점 4자리까지 계산한 근사치를 제시한 약 3.1875두였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한 풀이 과정 역시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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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종 제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