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풍채 좋은 은행나무 고목 ‘노란 잎비’ 800번 원주 반계리 나무 당상관 품계 받은 양평 용문사 나무 마음까지 밝게 물들이는 나무들
강원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 은행나무는 수령 800년의 천연기념물이다. 찬 바람이 불면서 은행잎이 꽃비가 되어 흩날리고, 나무 아래엔 노란색 카펫이 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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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은행나무는 수명이 길다. 전국에서 천연기념물이나 보호수로 지정된 노거수(老巨樹) 중에서는 은행나무가 가장 많다. 현재 전국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는 서울 성균관 문묘 은행나무, 경기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강원 원주시 반계리 은행나무 등 모두 25그루다. 향교나 서원, 절은 물론 동네 어귀를 호위무사처럼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는 1년에 딱 한 번 이맘때 황금색 ‘잎비’를 내린다. 그리고 노란색 이불을 환하게 깐다. 일천 번이나 장엄한 잎비를 내린 천년 고목 은행나무는 말 그대로 ‘가을의 전설’이다.
○천년 고목이 던지는 지혜와 위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키가 큰 경기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나무 주변을 한 바퀴 돌면 사방으로 뻗어나간 가지가 만들어낸 넉넉한 풍채와 변화무쌍한 위용을 볼 수 있다. 반계리 은행나무는 불꽃처럼 타오르다가 버섯처럼 솟아오르는가 하면, 한쪽 방향으로 휘청이기도 한다. 뒤쪽으로 돌아가면 엉덩이처럼 둥그런 두 덩어리로 서 있는 모습이 앙증맞기도 하다. 가슴 아픈 사건이 많은 스산한 가을에 은행나무의 넉넉하고 넉넉한 품은 커다란 위안을 준다. 경건한 마음으로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가을이 깊어갈 때 우리의 마음도 익어가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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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용문사에는 아파트 14층 높이인 은행나무가 있다. 높이는 42m, 수령은 1100여 년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살았고, 가장 키가 큰 나무다. 신라의 마지막 세자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심었다고도 하고,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으니 은행나무로 자랐다는 말도 있다. 세종 때는 장차관급인 정3품 당상관 품계를 받을 만큼 중히 여겨졌다. 화재로 타버린 천왕문 대신 은행나무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어 천왕목(天王木)으로 불린다. 1일 용문사 은행나무는 ‘잎비’를 내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노란 단풍잎이 눈처럼 흩날리는 영화 같은 풍경이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떨궈 버리는 장면인데도 천년 고목은 조금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길어봐야 백년 남짓 사는 사람에게, 천년 세월 동안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우리 곁을 지켜온 은행나무의 정신적 가치는 어떤 것과도 비교 불가다. 나도 노거수처럼 늙어가고, 언젠가 저렇게 떠나가기를 소망해 본다.
○노란 카펫이 깔리는 신비한 공간
수백 년 묵은 은행나무를 보러 멀리서 찾아왔는데 단풍잎이 거의 다 떨어졌다고 실망하긴 이르다. 나무 아래 형광색으로 환하게 깔린 은행잎을 보는 것만으로 일상에서 맛볼 수 없는 환희를 느낄 수 있다. 서울의 가로수 은행나무는 단풍잎이 떨어지는 대로 치우기 바쁘지만, 절이나 향교, 서원에 있는 단풍잎은 노란색 카펫으로 남아 오랫동안 특별한 감흥을 던져준다. 단풍잎이 떨어져 깔리면 더욱 아름다운 경남 밀양 금시당 은행나무.
1996년에 개봉한 강제규 감독의 영화 ‘은행나무 침대’에서 궁중악사 종문(한석규)과 미단 공주(진희경)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다 죽은 뒤 암수 은행나무 두 그루로 환생한다. 그리고 1000년 뒤에 미단 공주의 은행나무는 침대로 만들어지고, 은행나무에 깃들인 미단 공주의 영혼이 현실에서 나타나 벌어지는 판타지 스토리다. 이 영화에서 보듯이 은행나무는 암수가 구별된다. 암나무에서만 은행나무 열매가 열린다. 그래서 어느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 은행알 때문에 멀쩡한 암나무 가로수를 베어내기도 한다.
서울 성균관 문묘 담장 너머로 보이는 수령 400년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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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 800년이 넘은 은행나무 중에서 가장 넓은 수폭을 지닌 인천 장수동 은행나무.
경북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 은행나무는 가장 비싼 은행나무로 회자된다. 1990년 당시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은행나무는 수몰 위기에 처했지만 60억 원을 들여 4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옮겨 심어 700년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당시 나무를 들어 올리니 무게가 680t이나 나갔다고 한다.
해마다 은행나무가 떨군 노랑 단풍으로 카펫을 까는 아름다운 길은 전국에 산재해 있다. 강원 홍천군 내면 광원리를 비롯해 충북 괴산군 문광저수지 은행나무길, 충남 보령시 청라면 오서산길, 전남 담양군 수북면 대방리 나주시 남평읍, 경남 거창군 거창읍 의동마을, 경북 경주시 서면 도리마을 등이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충남 아산시 곡교천 은행나무길은 말 그대로 황금터널이다. 산림청과 생명의 숲 국민운동본부가 공동 주관한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거리숲’ 부분에 선정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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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