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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좋은걸 우리만 봐도 되나’…520페이지·3kg 괴물 같은 책은 이렇게 탄생했다

입력 | 2022-07-17 14:24:00

기생충 각본집, 올드보이 블루레이 만든 백준오 대표 인터뷰




‘아가씨의 순간들’ 책과 북케이스. 플레인아카이브 제공



520페이지 분량에 3kg의 무게, 가격은 13만 원에 이르는 괴물 같은 책이 나왔다.

지난달 10일 출간된 박찬욱 감독 영화 ‘아가씨’(2016년)의 스틸사진집 ‘아가씨의 순간들’(플레인아카이브). 플레인아카이브가 그간 냈던 사진집은 풀 컬러에 양장제본이라도 4만 원을 넘지 않았다. 이전 최고가는 ‘리틀 포레스트 사진집’(2021년·3만7000원).

하지만 13만 원이라는 고가에도 불구하고 영화 ‘아가씨’를 유형의 추억으로 간직하고자 하는 팬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텀블벅에서 약 2500권이 선주문 돼 3억 원이 모였다. 온라인 서점 판매량을 합치면 책은 2800권 가량 팔렸다.

2013년 플레인아카이브를 창업한 백준오 대표. 백준오 제공



전무후무한 책을 선보인 플레인아카이브는 블루레이, 각본집 등 영화 굿즈를 제작하는 회사다. 영화광들 사이에서는 감각적인 패키지 디자인과 기획력으로 ‘장인’이란 정평이 나며 박찬욱 봉준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등 거장들이 믿고 맡기는 회사가 됐다.

2013년 블루레이 제작사로 문을 연 플레인아카이브는 ‘멜랑콜리아’(2011년)를 시작으로 ‘돼지의 왕’(2011년) ‘들개’(2013년) ‘올드보이’(2003년) ‘캐롤’(2015년) 등 총 75개의 블루레이를 냈다. 분야를 넓혀 봉 감독의 ‘기생충’(2019년) 각본집과 스토리보드북,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년),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년), ‘어느 가족’(2018년) 각본집도 출간했다. 8일 서울 마포구 카페에서 플레인아카이브 백준오 대표(42)를 만났다.

플레인아카이브에서 나온 영화 ‘들개’의 블루레이. 주인공이 사제폭탄을 만들어 불특정다수에게 배송하는 내용을 반영해 영화 속 수제 폭탄 박스 이미지를 블루레이 케이스에 그대로 구현했다.



●3년 걸려 만든 ‘아가씨의 순간들’

‘아가씨의 순간들’을 만드는 과정은 어떤 출판사도 간 적 없는 길이었다. 김태리, 김민희가 주연을 맡은 ‘아가씨’는 팬덤이 공고한 영화인데다 20년 업력의 베테랑인 이재혁 스틸작가의 사진을 담은 사진집이었기에 무엇 하나 허투루 할 수 없었다.

가장 신경 쓴 건 북클로스(Bookcloth·책 표지를 싸는 천)였다. 영화에서 기모노가 주인공 히데코(김민희)의 주된 의상인 만큼 기모노 느낌을 갖는 북클로스를 원했다. 국내 업체 중에선 맘에 드는 색상과 소재의 북클로스를 찾을 수 없어 수소문한 끝에 미국과 네덜란드 업체에서 천을 수입했다. 표지에 들어가는 글자를 ‘박 인쇄’(글자에 열과 압력을 가하는 방식)하는 과정에서는 깨알같이 작은 글씨도 뭉개지지 않게 하려고 테스트에만 북클로스 300만 원 어치를 썼다.

“‘아가씨’의 블루레이 제작을 맡으면서 이 작가로부터 약 1만 장의 스틸사진들을 받았어요. 사진들을 쭉 보는데 ‘이 좋은 걸 우리만 봐도 되나’ 하는 마음이 들어 사진집 기획을 시작했어요. 최대한 많은 사진을 싣는 게 목표였어요. 책의 분량 때문에 제책 과정이 쉽지 않아 절반 정도 내용을 덜어내자는 제본소 제안도 있었지만, 분량과 만듦새 모두 타협할 수 없는 부분들을 지키면서 완성도 높은 책을 만들기 위한 여정이 3년이 돼 버렸네요.”

미국 북클로스 업체 ‘탈라스’사에서 수입한 ‘아사히 포피 레드’ 색상의 천. ‘포피 레드’의 포피는 양귀비(Poppy)에서 딴 이름이다. 강렬한 색감과 고운 입자, 기모노를 연상케 하는 세로줄이 인상적이다.


본문과 표지의 책등이 붙어있지 않은 ‘OTA 바인딩’ 제본 방식을 사용한 ‘아가씨의 순간들’. 이 방식은 책을 폈을 때 가운데가 볼록해지지 않고 평평하게 만들어준다.



영화 제작 기간보다 더 오랜 기간동안 굿즈를 만드는 정성과 집요함은 영화감독들에게도 깊게 각인됐다. 블루레이 수집 마니아인 봉준호 감독도 그 중 하나다. 그는 틸다 스윈튼 주연의 ‘아이 엠 러브’ 블루레이를 처음 접한 뒤 플레인아카이브가 만드는 블루레이를 눈 여겨 봤다. 영화 ‘마더’(2009년) 10주년 기념 사진집 ‘메모리즈 오브 마더’(2019년) 제작을 백 대표에게 맡겼다. 그 시기와 맞물려 ‘기생충’의 각본집과 스토리보드북 기획도 제안했다. 백 대표는 기생충이 처음 공개된 칸 국제영화제 전이었던 2019년 초부터 책 출간을 기획했다.

2019년 출간된 ‘기생충’의 각본집과 스토리보드북.



“기생충 투자배급사였던 CJ ENM에 여러 출판사들로부터 제안이 들어왔는데 봉 감독님이 책에 바라는 여러 의견을 적극 수용한 저희의 의지를 잘 봐주셨어요. 뜻이 맞았기에 서로 적극적으로 의견을 나누면서 책을 만들었어요. 스토리보드북 표지를 실사가 아닌 일러스트로 한 건 만화를 좋아하는 봉 감독님 취향을 고려해 최대한 만화책 느낌을 내기 위함이었어요. 봉 감독님이 스토리보드북을 보고 ”만화가로 데뷔한 것 같다“고 하셨죠.”

●‘브로커’ 각본집·스토리보드북도 준비

플레인아카이브가 그간 출간한 히로카즈 감독의 각본집들.


올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송강호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긴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 각본집과 스토리보드북도 9월 출간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나온 적 없는 그의 각본집 3권을 내며 신뢰를 쌓은 덕이다. 히로카즈 감독의 스토리보드북이 별도로 출간되는 건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처음이다. 브로커의 크랭크인 소식이 들리자마자 백 대표가 배급사인 CJ ENM에 각본집과 스토리보드북 출간을 제안했다.

“히로카즈 감독도 봉 감독처럼 콘티를 직접 그리고 대사도 직접 손으로 씁니다. 내용 이해가 쉽게 일본어 대사를 지우고 한국어로 덮을까 고민하다가 손 글씨를 살리고 한국어 번역은 주석으로 달기로 했어요. 창작자의 머리에서 나온 최초의 기록을 보여주기 위해 원본을 그대로 살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히로카즈 감독은 콘티를 그릴 때 세로방향만 고수하지 않고 자유롭게 종이를 사용하는 스타일이라 가로 판형 스토리보드북으로 기획했습니다.”

영화 ‘올드보이’ 블루레이에 수록된 다큐멘터리 ‘올드데이즈’의 한 장면. 박찬욱 감독이 플레인아카이브와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플레인아카이브가 만든 ‘올드보이’ 블루레이.



‘영화를 간직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

소셜미디어에 적힌 플레인아카이브 소개다. 그 아름다움을 위해 백 대표는 장인정신으로 느리지만 타협 없이 간다. 3~4년에 걸쳐 영화 굿즈를 제작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장건재 감독의 ‘한여름의 판타지아’(2014년) 블루레이 제작에는 꼬박 4년이 걸렸다. 장 감독과 배우 김새벽, 이와세 료 세 사람과 일본 로케이션인 나라현 고조시를 직접 방문해 부가영상을 제작했다. 백 대표가 가장 애착을 갖는 자사 블루레이 ‘올드보이’에는 3년을 매달렸다. 올드보이 특별판 블루레이용으로 기획된 다큐멘터리 ‘올드 데이즈’를 만들기 위해 감독, 배우들과 차를 타고 촬영지를 돌아다니며 씨네마 카메라로 인터뷰를 찍었고,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그해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큰 회사라면 못하는 일이죠. 결정권자가 많고 효율적으로 판단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탈락되는 디테일들이 있거든요. 저희는 여력도 없고 직원도 부족하지만 디테일 하나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이 있어요. 그러다보니 출시가 지연되는 건 고객들에게 정말 죄송해요. 그래도 제품이 나왔을 때 ‘이거 만들려고 그렇게 오래 걸렸구나’란 말을 듣고 싶어요.”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