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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된 NYT명칼럼니스트 정치 도전의 꿈…‘비호감 후보’ 이미지만 남겨[정미경 기자의 글로벌 스포트라이트]

입력 | 2022-02-22 14:00:00


최근 미국 오리건 주 대법원이 주지사 도전을 선언한 니콜러스 크리스토프 전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62)에 대해 “출마 자격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번 판결로 37년 동안 뉴욕타임스 기자 및 칼럼니스트로 이름을 날린 크리스토프의 첫 공직 출마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주 이름 ‘오리건(Oregon)’에 빗대 크리스토프의 정치가 변신의 꿈이 “오리-건(Ore-Gone·사라져버렸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옵니다.

2021년 10월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서 주지사 출마를 선언하는 니콜러스 크리스토프 전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왼쪽). 그의 부인(오른쪽)과 어머니(가운데)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폴리티코


지난해 10월 크리스토프는 ‘희망을 가지고 독자들에게 작별을 고하다’라는 마지막 칼럼을 쓴 뒤 민주당 소속으로 오리건 주지사에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올해 11월 선출되는 오리건 주지사에 출마하기 위해 1월 주 선거관리위원회에 후보 등록을 하려고 했지만 퇴짜를 맞았습니다. 거주 요건 미달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오리건 주 선거법에 따르면 주요 공직에 출마하려는 후보는 선거일 이전에 최소 3년간 주에서 거주해야 합니다. 크리스토프는 뉴욕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고,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 오리건에 주택을 보유해왔다”며 법원에 항소했습니다. 이에 대해 주 대법원이 “출마 자격이 없다”는 최종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법원은 크리스토프가 2020년 대선 때 뉴욕 주 유권자로 등록해 투표한 점, 자동차 운전면허증 주소가 뉴욕으로 돼있는 점, 세금납부 서류상 주소가 뉴욕인 점 등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크리스토프는 유세 때마다 “오리건은 내 마음의 고향”이라고 목소리를 높여왔습니다.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태어났지만 10대 성장기 시절을 오리건에서 보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12세쯤 오리건으로 이사해 북부의 작은 도시 얌힐에서 자랐고 지역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부모는 모두 오리건 주 포틀랜드대 교수를 지냈습니다. 이후 오리건을 떠나 하버드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했고, 로즈 장학생으로 선발돼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유학한 뒤 뉴욕타임스에 입사했습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시절 수단 다르푸르 내전을 취재하고 있는 니콜러스 크리스토프(가운데). 그는 2006년 다르푸르 취재로 두 번째 퓰리처상을 받았다. 뉴욕타임스


자타가 공인하는 미국 최고의 언론 뉴욕타임스는 유명 기자와 칼럼니스트를 다수 보유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프는 토머스 프리드먼, 폴 크루그먼, 모린 다우드 등 다른 칼럼니스트들에 비해 우리나라에는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미국에서는 이들과 함께 1990~2000년대 뉴욕타임스 칼럼 황금시대를 이끈 인물 중 한명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사무실 책상에서 글을 쓰기보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취재해 ‘현장 칼럼니스트’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1990년 베이징 특파원 시절 천안문 사태를 생생히 전해 퓰리처상 국제보도 부문을 수상했고, 2006년 수단 다르푸르 인종학살 현장을 심층 보도해 코멘터리(의견비평) 부문에서 두 번째 퓰리처상을 받았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시대에는 국제 이슈보다 국내 문제에 집중했습니다. “기자들이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하느라 국민 피부에 와 닿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놓치고 있다”면서 언론의 반성을 촉구하는 칼럼을 쓰기도 했습니다.

크리스토프가 뉴욕타임스에 사표를 쓰고 공직 출마를 선언했을 때 회의적인 시선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즉흥적 일면을 가진 성격에서 나온 “심사숙고를 거치지 않은 결정인 듯 하다”는 분석 기사들이 나왔습니다.

미국에서 언론인에서 정치인으로 진로를 바꾼 사례는 상당히 많습니다. 대부분 중앙 언론보다는 지역 매체 출신이며, 정치의 꿈을 이루기 위한 일종의 경험 축적 차원에서 언론을 거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늦지 않은 30~40대 나이에 커리어 전환이 이뤄집니다.

언론인 출신 정치인의 성공 사례로 자주 거론되는 앨 고어 전 부통령, 세라 페일린 전 알래스카 주지사, 패트릭 뷰캐넌 전 백악관 공보국장 등은 지역 매체의 기자나 앵커 출신이며 40대가 되기 전에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정치잡지 ‘내셔널리뷰’ 발행인 윌리엄 버클리, 소비자 보호 관련 글을 많이 쓴 랠프 네이더, 작가 고어 비달 등은 언론인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은 뒤 대통령이나 다른 공직에 도전한 적이 있지만 정치인이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을 알리고 이목을 끌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 성격이 강했습니다.

언론인 출신의 정치인 앨 고어 전 부통령(오른쪽). 정치에 입문하기 전 고향 테네시 주의 신문 ‘테네시안’에서 경찰담당 기자로 5년간 일했다. USA투데이


크리스토프 본인이 각종 인터뷰를 통해 밝힌 출마 동기는 2020년 출간된 저서 ‘타이트로프: 희망을 찾는 미국인들’에 있습니다. 책은 미국 소도시들이 높은 실업률, 청소년 탈선, 마약, 노숙자 등의 문제로 인해 몰락되는 과정을 크리스토프가 자신의 고향인 오리건 주 얌힐을 사례로 들어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그의 얌힐 고교 동창생 4명 중 1명이 이미 사망했다는 내용 등이 담겼습니다. 책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고, CNN에서 크리스토프가 진행을 맡은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됐습니다.

‘타이트로프’는 미국 소도시까지 침투한 다양한 사회문제의 원인을 ‘고장난 정치 시스템’에서 찾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프는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서 직접 뛰어들어 시스템을 고쳐보기로 결심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민주당의 다른 경쟁 후보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액수인 260만 달러(31억원)의 선거자금을 모았습니다. 빌 게이츠(5만 달러), 링크트인 설립자(10만 달러), 위워크 설립자(5만 달러) 등 언론인 시절 크리스토프와 친한 기업가들이 선뜻 정치자금을 내놓았습니다.

뉴욕타임스 베이징 특파원 시절 니콜러스 크리스토프. 그는 1990년 천안문 사태 취재로 첫 번째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의 부인(왼쪽)도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이다. 뉴욕타임스


하지만 크리스토프에 대한 비판 여론도 커졌습니다. 특히 오리건 주민들은 “우리 지역은 책에서 묘사된 것처럼 그렇게 끔찍한 곳이 아니다”면서 반감을 표출했습니다. 크리스토프가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고향의 부정적인 단면을 과대포장했다는 것입니다. 주 선관위가 크리스토프의 출마 자격을 문제 삼은 것도 지역 민심이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3년 거주 요건의 오리건 주 선거법이 지나치게 구식이라는 비판이 있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를 무시하고 출마하려다가 무산된 것은 자업자득이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법원의 출마 불가 판결 후 크리스토프는 지역방송 인터뷰를 통해 “나의 주장을 계속 펼쳐나갈 다른 길을 모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재출마할지, 언론계로 돌아올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은 듯 합니다. 향후 어떤 진로를 택하던지 ‘비호감’ 이미지만 낳은 이번 도전에 대해 “뉴욕타임스 명칼럼스니스트도 별수 없다”는 뒷얘기가 무성합니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의 지적대로 크리스토프의 정치 도전기는 “자신이 애써 쌓아온 브랜드만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