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기록된 전북 곰소만 염전 위치 백제시대-조선시대 기록 비교하니, 마을에서 800m 더 멀어진 것으로 추정 정확한 검사위해 진흙-모래 분석 갯벌 흙이 공기와 만난 토양층 발견…해수면 낮아져 갯벌 드러났다는 증거
전북 고창군 대죽도 주변의 모래갯벌 전경. 동아일보 DB
조선 후기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에 등장하는 설화에 따르면 백제 27대 위덕왕 24년(577년) 전북 고창군 선운산 계곡엔 많은 도적이 살고 있었습니다. 도적들은 금품을 훔치고 주변 민가에 폐를 끼쳤지요. 이를 본 스님 검당선사는 도적들을 모아 바닷가에서 소금 만드는 법, 닥지로 한지 만드는 법, 숯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며 사람답게 살라고 일러주었어요. 그때부터 도적들은 전통 소금인 ‘자염’을 생업으로 만들기 시작했고 개과천선하게 되었어요. 이후 이들은 보답으로 검당선사가 창건한 선운사에 은혜를 갚는 소금 ‘보은염’을 한 가마씩 바쳤고 새로운 인생을 열어준 검당선사의 이름을 따 마을 이름도 검당이라 지었습니다.
○설화, 지리서, 지도로 살펴본 해수면의 변화
‘지봉유설’ (1614년)을 통해 검당마을 앞에 염전이 위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 DB
올해 10월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남욱현 박사와 경북대 최정해 교수팀은 전북 곰소만의 지형과 고문서에 나온 염전 위치의 기록을 연관 지어 ‘해수면의 변화’를 파악했다고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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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박사팀은 ‘지봉유설’과 주변의 제방 위치와 높이, 곰소만의 고도를 고려했을 때 백제 시대인 500년 전후엔 검당마을 바로 앞 갯벌에 염전이 있었을 거라 추정했습니다. 반면 조선 초기(1530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엔 검당마을에서 바다 쪽을 향해 약 800m 들어간 갯벌에서 함수를 퍼왔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해수면이 낮아져 바다가 검당마을에서 멀어졌단 뜻이죠. 연구팀은 ‘택리지’와 ‘지방지도’를 추가 분석해 해수면이 1500년대에는 낮아졌다가 1800년대 이후로는 다시 높아져 지금에 이르렀다고 유추했습니다.
○땅속 단서, 고문서와 일치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오른쪽 사진·1530년)에는 검당포에서 바다로 2리(약 800m) 들어간 곳에서 바닷물을 길어다가 불에 졸여 소금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담겼다. 염전이 바다 쪽으로 약 800m 들어간 곳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유추했다. 동아일보 DB
연구팀은 우선 깊이 1m 시추공에서 진흙과 모래 등을 5cm 간격으로 퍼 다양한 방법으로 분석했습니다. 흙을 물에 풀어 레이저를 쏜 뒤 모래와 진흙 등 크기가 다른 입자를 분석해 층의 구성을 살폈습니다. 흙에 바다에 사는 식물성 플랑크톤인 ‘규조류’가 있는지 현미경으로 살펴 당시 토양층이 갯벌인지 알아보았지요. 방사성동위원소 연대 측정 기기를 이용해 각 층이 언제 쌓였는지 시기를 분석했습니다.
연구팀은 시추 시료에서 갯벌 흙이 공기 중에 드러나며 만들어지는 토양층을 발견했어요. 이는 해수면이 낮아져 갯벌이 물 밖으로 드러나며 토양층이 됐다는 의미입니다.
1500∼1850년 사이 소빙하기가 오며 전 세계적으로 해수면이 낮아졌습니다. 시추 자료에서도 1500년대 초반부터 1700년대 중반까지 서해안 해수면이 비교적 큰 폭으로 낮아져 갯벌이 드러났어요. 다만 다시 해수면이 상승하는 시기가 서해안에선 소빙기 말(1850년)보다 일찍 시작됐는데, 연구팀은 1700년대 초 그린란드 빙하가 녹은 것이 한반도 주변의 해수면 상승을 유도한 것으로 봤습니다. 2017년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연구팀이 그린란드 빙하가 녹은 물이 바다로 흘러들 때, 특히 서태평양에서 해수면 상승이 크다고 발표한 연구를 근거로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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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란 어린이과학동아 기자 r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