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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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정치는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특히 러시아의 경우 푸시킨에서부터 솔제니친에 이르기까지 정치와 무관한 문호는 존재한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시아 작가에게 ‘참여’냐 ‘순수’냐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어떻게’ 참여하는가만이 문제다. 러시아에서 작가란 재미있고 아름다운 허구를 지어내는 장인이 아니라 심오한 통찰력으로 현실 정치를 비판하고 민중을 이끌어가는 ‘큰 스승’이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시인과 혁명이 만났을 때
마야콥스키는 1910년대 러시아 시단에 미래주의라는 아방가르드 유파와 함께 등장했다. 미래주의자들은 기존하는 모든 것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들은 구습에 물든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리고” 케케묵은 예술의 전통을 단박에 부숴버리기 위해 가장 전위적이고 기상천외한 형식의 실험에 뛰어들었다. 이 시점에서 미래주의는 공산주의와 의기투합했다. 양자 모두 기득권을 분쇄하고 새로운 질서를 도입한다는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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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혁명이 적군의 승리로 마무리되고 소비에트 관료주의가 정착해감에 따라 시인과 공산주의의 밀월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향해 치달았다. 가장 치명적인 요인은 양자가 견지한 극명하게 다른 혁명관이었다. 마야콥스키가 헌신한 예술 형식의 혁명은 ‘영원히 진행 중인’ 창조행위였다. 반면 소비에트 정권에 볼셰비키 혁명은 ‘마지막 혁명’이 되어야만 했다. 자기들이 ‘마지막 혁명’의 완성자라 주장하는 정권은 철저하게 당의 통제를 받는 평균적인 문학을 요구했고 ‘영원히 진행 중인’ 창조의 주역은 통제와 평준화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시인은 혁신을 깔아뭉개는 문화정책과 “털어도 털어도 날마다 되앉는 먼지” 같은 진부함에 분노했다. 그는 “총검에 버금가는 펜”을 소비에트 권력자들, 민완가와 책략가들, 정치적 속물들에게 겨누었다. 한때 혁명의 나팔수를 자처했던 시인이 정권의 눈엣가시로 전락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 번의 정치적 타살
소비에트 정권의 눈엣가시였던 마야콥스키가 1930년 사망하자 스탈린은 그를 “소비에트 시대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치켜세운다. 이후 구 소련 전역에 마야콥스키 동상과 그의 이름을 딴 광장이 들어선다. 사진은 1958년 모스크바 마야콥스키 광장에 세워진 동상. 조각가 알렉산드르 키발니코프의 작품이다. 광장은 현재 승리광장으로 개명됐다. 석영중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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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그’ 넘친 청춘의 시인
마야콥스키가 12세 때 쓴 시. 어머니와 두 누나가 살던 아파트에 전시돼 있다. 석영중 교수 제공
마야콥스키는 영원한 청춘의 시인이다. 그의 시 속에 들어있는 도전과 용기와 자유와 분방함과 대담함은 젊음만의 특권이다. 그의 시는 청춘의 오만과 분노와 과장과 허세까지도 자양분으로 흡수한다. 그 혼란스럽고 눈부신 젊음의 힘은 늙어가는 소비에트 정권에 경종을 울리며 20세기 시사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화려하고 극적이고 창의적인 표현을, 가장 저돌적이고 역동적인 리듬을 창출해냈다. 그는 음악에서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영화에서의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 이룩한 것과 동등한 업적을 시에서 이룩했다. 모스크바의 마야콥스키 기념관이 장기간에 걸친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거쳐 2023년에 개장될 예정이라고 한다. 지난 세기 러시아가 낳은 최고의 시인을 정치 혁명의 아이콘이 아닌 창조와 혁신의 아이콘으로 재평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