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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플래시100]“국가 대신 자유를!” 검은 옷 입은 혁명가들의 첫 재판

입력 | 2021-09-03 11:40:00

1925년 10월 28일





플래시백

1925년 10월 27일 경성지방법원 제7호실 안팎은 꽤 어두운 분위기였습니다. 피고들은 물론이고 방청객들 중에서도 검은색 옷차림을 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죠. 일제가 나라를 빼앗은 뒤 흰옷을 입지 말라고 강제한 탓만은 아닌 듯했습니다. 피고들과 방청객 일부가 품은 이념 때문이었죠. 바로 ‘아나키즘(anarchism)’입니다. 아나키즘을 상징하는 색깔이 검은색이거든요. 한 피고는 호(號)까지 흑영, 즉 검은 그림자였죠. 이날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조직원 9명이 처음으로 법정에 섰습니다. ‘흑기연맹’사건입니다. ‘초유의 무정부주의자 공판’ 제목을 붙인 동아일보 기사는 ‘방청석에는 검은 옷 입은 주의자들이 많이 섞여’ 있다고 전했죠. 피고들은 같은 해 4월 흑기연맹을 발기했고 5월 전선아나키스트대회를 열려고 했습니다.



‘자유 평등의 인류로 조직된 사회가 아니면 완전한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인류의 천부적 자유 평등을 해치는 것이 있다면 파괴 배척하지 않을 수 없다.’ 흑기연맹 조직원들이 내건 취지입니다. 아나키즘은 개인의 절대 자유를 가장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만약 자유를 옥죈다고 하면 권력이든 정부든 국가든 모두 타도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당시 아나키스트들은 자본주의, 공산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민족주의도 거부했습니다. 자본주의는 자본가계급이 자유를 억누르니까 인정하지 않았죠. 공산주의의 프롤레타리아독재는 자본가계급의 지배보다 더 나쁘다고 비판했고요. 민족주의운동으로 독립을 얻더라도 권력자가 바뀐 것에 불과하다며 민족주의와도 공존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서상경과 신영우는 일본 도쿄에서 박열과 만나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 서정기는 서상경과 6촌 사이로 인척이었다. 윤우열은 흑기연맹사건 때 검거되지는 않았지만 1926년 허무당선언서를 발표해 징역 2년형을 받았다. 이기영은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가입해 활동한 소설가로 해방 후 월북했다.  아래 사진 왼쪽은 흑기연맹사건 법정 밖에 모인 군중들이고 오른쪽은 법정에 불려나온 흑기연맹 조직원들이다.



법정에 선 흑기연맹 조직원 중 서상경 신영우 홍진유 등은 박열과 관련이 있습니다. 박열은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와 옥중결혼하며 함께 일제에 맞섰던 바로 그 사람이죠. 3‧1운동 직후 일본에 건너가 아나키즘에 기울어 있던 박열의 허름한 집에서 함께 막일 등으로 고생하며 뜻을 나눴습니다. 박열은 1922년 말 흑우회를, 이듬해에는 행동에 나설 별도조직으로 불령사를 만들었습니다. 위 3명은 흑우회에 가입했고 이중 2명은 불령사에도 가세했습니다. 일제가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험악해진 국내 분위기를 진정시키려는 계략으로 박열을 체포했을 때 이들도 함께 붙잡혔죠. 하지만 1924년 박열을 제외하고는 모두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국내로 돌아와 조직한 단체가 흑기연맹이었죠.

동아일보 1925년 9월 18일자에 실린 흑기연맹사건 예심종결서 전문. 5단 세로짜기 원고를 2단 크기로 잘라 이어 붙였기 때문에 화살표 방향에 따라 읽어나가야 한다.



일제강점기 때 아나키스트들은 투쟁수단으로 테러를 제일 앞세웠습니다. 권력에 맞선다면 살인이나 방화 강도짓 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죠. 특히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포를 일깨우려면 테러 말고는 뾰족한 수단이 없기도 했습니다. 무장투쟁은 이들이 군대를 부정하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죠. 하지만 흑기연맹은 결성 초기단계에서 적발돼 이렇다 할 투쟁을 벌일 여유가 없었습니다. 박열이 일본에서 조직했던 불령사만 해도 테러라고 해야 고작 친일파 구타에 그쳤고 강연회나 응원전보 보내기를 하는 수준이었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설 역량이 되지 않았던 탓이었을 겁니다.

오른쪽은 검사가 흑기연맹 피고 9명 전원에게 각각 징역 1년형을 구형했다는 동아일보 1925년 10월 29일자 기사. 왼쪽은 법원이 흑기연맹 피고 9명 전원에게 검사의 구형과 똑같은 징역 1년형을 선고했다는 동아일보 1925년 11월 18일자 기사.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언제나 힘겨운 역경이었습니다. 법원까지도 공개재판을 갑자기 방청 금지했습니다. 치안방해가 염려된다면서요. 흑기연맹 조직원들의 주장이 널리 알려지지 않도록 차단하려는 의도였겠죠. 이 때문에 동아일보는 재판 지상중계를 10월 28일자 하루치만 실을 수밖에 없었죠. 여기에 공산주의자들은 한술 더 떴습니다. 흑기연맹이 초기에 무너진 배경에는 공산주의자들의 밀고가 있었다고 하니까요. 독립운동세력이 우파와 좌파의 양쪽으로 선명하게 갈리면서 아나키스트들이 설 자리가 갈수록 좁아지는 신호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나키스트에 안팎의 이목이 다시 집중된 때는 1926년. 일본 법정에서 전개된 박열의 투쟁으로 내각이 무너질 정도였습니다.


원문


組織(조직) 前(전) 檢擧(검거)된 黑旗聯盟(흑기연맹)
初有(초유)의 無政府主義者(무정부주의자) 公判(공판)
◇작일 오젼 열한시부터 경셩디방법원에서
談笑自若(담소자약)한 被告(피고)들의 供述(공술)


事實梗槪(사실경개)

이 혹긔련맹사건의 피고들은 모다 무정부주의자로써 인류는 어느 뎜으로든지 자유와 평등이 되지 아니치 못할 것이요 이 자유 평등의 인류로써 조직된 사회가 아니면 완전한 사회라 할 수 업는 동시에 정치뎍으로나 경제뎍으로 인류의 이 텬부한 자유 평등을 해하는 뎜이 잇다 하면 이것을 파괴 배척치 아니할 수 업다는 사상을 가지고 피고 서천순(徐千淳) 서뎡긔(徐廷夔) 서상경(徐相庚) 곽윤모(郭胤模) 등은 작년 십이월 경으로부터 충북 충주디방과 경성을 중심으로 동지를 모집하야 금년 삼월경에는 모다 서울로 올라와서 별항 피고 전부가 락원동(樂園洞) 이백팔십사번디 수문사(修文社)에 모히어 흑긔련맹(黑旗聯盟)을 조직한 후 그 주의 강령으로 과격한 취의서(趣意書)를 만들고 오월경에 뎡동(貞洞) 일번디에서 발회식을 거행하야、널리 동지를 모집하려 하다가 경찰의 탐문한 바 되어 전부 톄포되엿든 사건인데 지난 칠월 이십구일 예심을 맛친 것이다.

混雜(혼잡)한 法廷(법정) 內外(내외)
黑衣(흑의)의 傍聽客(방청객)
빗 다른 공판에 빗 다른 방텽객들
혼잡한 문 어구는 경관들이 감시
警官(경관) 四名(4명)이 門前(문전)을 警戒(경계)


일흔 아츰부터 모혀 드는 방텽자들이 재판소 넓은 마당을 둘러싸고 금시에 무슨 일이나 이르킬 것 가치 이쪽저쪽에서 법뎡 문이 열리기만 긔다리고 잇섯다. 열시반이나 되어 경관 네 명이 칠호 법뎡문 어구를 막아서고 몰려드는 방텽객을 차레로 드려 보내고저 하엿스나 원악 만흔 사람이 되매 두서를 차리지 못하야 문으로 드러가는 사람을 경관이 뒤로 달려와서 끌어내는 등 한동안 그 혼잡한 모양을 형언하기 어려웟다. 모처럼 색달은 공판을 구경코저 몰려들엇든 사람들이 태반이나 섭섭한 얼골로 구지 닷친 문만 치어다 보고 섯다가 간혹 문이 열리는 틈을 타서 서로 밀치고 법뎡으로 밀려드는 사람도 만핫스며 넓은 법뎡 안은 립추의 여디도 업섯고 방텽석에는 검은 옷 입은 주의자들이 만히 석기여 법뎡 안은 보이지 안는 검은 빗이 흘러 잇섯고 피고석에는 오래동안 텰창 생활로 초최하게 된 아홉명이나 되는 만흔 피고가 오래간만에 세상 사람의 얼골을 대하야 신긔한 듯키 사방을 둘러보고 잇섯스며 변호사석에 리인(李仁)씨 김용무(金用茂)씨 김긔현(金基賢)씨 등이 긔록을 뒤지고 잇자

制令(제령) 違反(위반)으로
公判(공판) 開廷(개정)을 宣言(선언)


열한시경에 협(脇)재판댱 리견(里見)검사가 차레로 착석하야 먼저 다른 사건의 언도를 잠간 맛치고
京城府(경성부) 鳳翼洞(봉익동) 三八(38) 李哲事(이철사)
無職(무직) 李復遠(이복원)(二四‧24)
鎭南浦(진남포) 龍井里(용정리) 一二○(120)
無職(무직) 韓眪熙(한병희)(二三‧23)
京城府(경성부) 貞洞(정동) 一(1) 郭撤事(곽철사)
無職(무직) 郭胤模(곽윤모)(二四‧24)
淸州郡(청주군) 淸州面(청주면) 西川里(서천리) 一六八(168) 申熖玻事(신염파사)
無職(무직) 申榮雨(신영우)(二三‧23)
鎭南浦(진남포) 府漢頭里(부한두리) 六二(62)
無職(무직) 李昌植(이창식)(二五‧25)
忠州郡(충주군) 利柳面(이류면) 大昌里(대창리)
農(농) 徐廷夔(서정기)(二八‧28)
忠州郡(충주군) 忠州面(충주면) 龍山里(용산리)
著述業(저술업) 徐相庚(서상경)(二六‧26)
論山郡(논산군) 連山面(연산면) 華山里(화산리) 一二○(120)
農(농) 洪鎭祐(홍진우)(二九‧29)
忠州郡(충주군) 薪尼面(신니면) 新淸里(신청리) 徐哲事(서철사)
無職(무직) 徐千淳(서천순)(二五‧25)
을 차레로 불러 세우고 주소와 성명 등을 됴사한 후 재판댱은 피고들에게 대하야 대정(大正) 팔년(八年) 제령뎨칠호(制令第七號) 위반(違反)에 대한 공판을 연다고 선언하고 피고 여러 사람에게 예삼종결서 송달을 바닷는냐 물은 후 그 사실이 틀리지 안앗드냐 하야 치레로 물음애 피고 중 곽윤모 한 사람이 틀리지 아니하엿다고 대답하고 남어지는 전부 틀린다고도 하고 긔억에 남아 잇지 아니하다고 하엿다.

事實審問(사실심문)
李復遠(리복원)

몬저 피고 리복원을 불러 세우고 형벌바든 일의 유무를 물은 후 재산이 잇는가.
나의 재산은 업소. 집 재산은 물으겟소.
종교는?
업소.
현재 무슨 단톄에 참가하엿는가.
현재에 잇는 단톄에는 가담한 일 업소.
금년 삼월부터 피고의 집에서 서천순 외 여러 피고와 모히어 무정부주의에 대한 협의를 한 일이 잇는가.
잇소.
선뎐과 연구를 목뎍하고 사상단톄를 조직하고저 하엿는가.
연구는 하려 하엿서도 선뎐할 목뎍은 업섯소.
금년 사월 이십일일 락원동에서 여러 사람과 흑긔련맹을 조직한 일이 잇나.
잇소.
피고는 서뎡긔를 아나.
아오.
엇더케 알앗스며 무슨 일을 의론한 일이 잇는가.
금년 전부터 알앗는데 흑긔련맹에 대한 말은 업섯소.
사상은 공명하는가.
공명하는지 안는지 즉접 무러보지는 아니하엿스나 다른 사람에게 들어 공명하는 줄은 알앗소.
홍진우 등과 사상단톄를 조직하고저 말한 일이 업섯는가.
업섯소.
홍진우와 흑긔련맹을 조직하고저 말한 일이 잇섯는가.
그와 사상은 공명될 줄 아나 여러 가지 사정상 단톄에 참가하지는 못할 줄 알앗소.
그 외 여섯명은 종종 수문사에 모히어 한 가지 단톄를 만들어 활동하자는 말이 잇섯지.
잇섯소.
오월 삼일에 뎡동에서 흑긔련맹에 대한 선언문(宣言文)을 긔초하엿는가.
처음에 내가 하다가 뒤에 신영우에게 맛기어 쓰도록 하엿소. 그것이 경찰서를 통하지 못할 것을 알고 치고저 하엿스나 곳칠 틈이 업섯고 그 취지에는 찬성하엿소.
그것을 가지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에 게재하고저 가저 갓든가.
그럿소. 그 원고는 내 손으로 써가지고 가저 갓섯소.
뎡동에서 발긔총회를 하자든 것은 잘 되엿는가.
이 모양으로 잡히엇기 때문에 잘 되지 못하엿소.
주의 주댱을 선뎐하기 위하야 흑긔련맹의 긔관 잡지를 발행코저 하엿는가.
흑긔련맹과는 관계 업는 엇던 잡지를 발행하고저 하엿섯소.

韓昞熙(한병희)
◇피고 한병희는 빙글빙글 우스면서 이러나니
재산은 얼마나 되는가.
한 이천원 되나 자세한 것은 몰으겟소.
수문사와 흑긔련맹에 대한 말을 하여보라.
나는 수문사에 종종 놀러 다녓는데 한 번은 가닛가 신영우가 무엇을 쓰고 잇기에 그것을 나의 수첩에 적어두엇고 무정부주의에 대한 연구단톄를 만들고저 하기에 그에는 찬성을 하엿스나 나는 서울에 잇슬 수 업는 형편임으로 발긔인이 될 수 업다고 하엿소.
흑긔련맹의 긔관 잡지를 발행하고저 이백원 가량 준비하자는 것을 리복원은 부인하는데 피고는 들엇는가.
누구에게 들엇는지는 몰으나 듯기는 하엿소.

美術(미술)에 思想硏究(사상연구)
재판댱은 익살까지 부리여


郭胤模(곽윤모)
다시 피고 곽윤모를 불러 세우고 피고는 여러 학교에 다닌 모양인데 무슨 전문을 조하하는가.
중학교는 여러 곳에 다니엇스나 전문은 미술학교에 다니엇소.
그림 그릴 줄 아는가.
그림이 아니라 됴각과에 다니엇소.
미술학교에서 사상연구를 하는가.
하고 재판댱이 물음애 방텽석에서 우슴이 터지고 피고도 우서버린다.
흥진우 서천순과 친한가.
친하오.
그 사람들과 무슨 단톄 조직에 대한 말이 잇섯는가.
홍진우와는 별로 말한 일이 업고 서천순과는 말한 일이 잇소.
사월 이십일일에 작뎡한 선언 강령을 오월 삼일 총회에서 개정할 수는 잇지마는 흑긔련맹은 발서 이십일일에 성립된 것이 아니냐.
우연히 의론이 일치하엿슬 뿐이요 성립되엿다고는 볼 수 업겟지요.

申榮雨(신영우)
다음으로 피고 신영우를 불러 세우고 학교에서 무엇을 하겟다는 희망이 업섯나.
어학을 배호고 십허하엿소.
고등학교에 입학코저 하엿나.
고등학교 문과에 입학코저 하엿소.
문과면 순문학을 연구코저 하엿는가. 주의 방면의 문학을 연구코저 하엿는가.
별로히 작뎡하지는 안엇소.
흑긔련맹의 취의서를 긔안하엿는가.
긔안하엿소.
그 긔안에 씨여 잇는 내용에 다른 여러 피고들이 공명하든가.
그 긔안을 복안으로 발긔총희에 뎨출코저 하엿슴으로 다른 사람들과 충분히 토의하여 보지 못하엿소.
종교는.
업소.
사상단톄에 가입하엿는가.
가입한 곳이 업소.

李昌植(이창식)
재산은?
업소.
원산 엇던 학교에서 교원 노릇을 하엿는가.
산술과 일어를 가르치고 잇섯소.
육영(育英)에 대하야 의견이 업는가.
경험이 별로 업서서 이러타는 의견이 업소.
흑긔련맹이란 이름은 별 문뎨로 하고라도 이십일일 피고들이 엇던 단톄를 조직한 것으로 볼 수 잇지 안은가.
그러케 볼 수 업겟지요.
피고들 중 여섯 명이 사월 이십일일에 모히어 흑긔련맹을 조직하자고 의견이 일치된 모양인데 그 이외의 피고 세 명은 흑긔련맹과 엇더한 관계가 잇는가.
그 중에서 서천순의 말은 들엇스나 그 외 두 명의 말은 듯지 못하엿소.
이때 재판댱은 뒤에 자세한 것을 뭇겟다 하고 자리에 안친 후

黑字(흑자)와 被告關係(피고관계)
피고도 읏고 방텽객도 우슴

徐相庚(서상경)
서상경을 불러 세우고 동경서 흑룡회(黑龍會) 회원으로 잇섯는가.
그럿소.
피고의 호가 흑영(黑影)인가.
그럿소.
흑룡회원으로 흑영이라 하니 피고와 검은 것과는 무슨 관게가 잇는가.
함애 피고는 우섯버리고 말앗다.
흑긔련명에 대하야 피고는 다른 사람 말과 틀리는 뎜이 업는가.
다른 사람들의 말과 대개 갓소.

洪鎭祐(홍진우)
대뎐(大田)에서 로농동지회(勞農同志會)를 조직하엿는가.
조직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 회의 위원이엇소.
로농동지회란 무슨 일을 하는가.
농민운동을 한다 합듸다.
흑긔련맹사건에 대하야 다른 피고가 말한 바와 다른 뎜이 업는가.
별로 업소.
서뎡긔를 제한 여러 피고들이 모히어 흑기련맹을 조직코저 하엿다 하니 그런가.
그러치 아니하오. 나는 싀골 가서 그런 것을 잘 몰으오.

一潟千里(일석천리)
피고 두 명을 심문한 후
잠간 휴식 선언

다음에 서천순이가 깁흔 도수경을 끼고 이러서서 역시 흑긔련맹 조직에 대한 문답이 잇슨 후 서뎡긔의 실문을 맛치고 재판댱은 잠간 휴식을 선엇하니 때는 열두시 사십분이엇다.(다음은 명일)

治安妨害(치안방해) 念慮(염려)로
公判(공판) 傍聽禁止(방청금지)
辯護士(변호사)만 出席(출석) 繼續(계속)


오후 두시 십분에 다시 공판을 개뎡하고 계속 심문을 선언한 후 즉시 협(脇)재판댱으로부터 이후부터는 이 사건에 대한 문답이 공안(公安)을 방해할 념녀가 잇슴으로 방텽을 금지한다고 선언하야 변호사 이외의 모든 방뎡자를 내여보냄에 모다 가기가 실흔 듯이 법뎡 문밧게서 한참 동안이나 헤여지지 아니하고 서어 잇섯다.


현대문
조직 전 검거된 흑기연맹
최초의 무정부주의자 공판
◇전날 오전 11시부터 경성지방법원에서
평소 같은 피고들의 진술


사실 요약
이 흑기연맹 사건의 피고들은 모두 무정부주의자들이다. 인류는 어떤 점으로든지 자유와 평등이 되지 않을 수 없고 이 자유 평등의 인류로서 조직된 사회가 아니면 완전한 사회라고 할 수 없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인류의 이 천부한 자유 평등을 해하는 점이 있다고 하면 이것을 파괴 배척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상을 지닌 피고 서천순 서정기 서상경 곽윤모 등은 지난해 12월경부터 충북 충주지방과 경성을 중심으로 동지를 모집하여 올해 3월경에는 모두 서울로 올라와서 다른 피고 전부가 낙원동 284번지 수문사에 모여 흑기연맹을 조직하였다. 그 뒤 그 주의와 강령으로 과격한 취지서를 만들고 5월경에 정동 1번지에서 발회식을 거행하여 널리 동지를 모집하려 하다가 경찰의 탐문에 걸려 모두 체포되었던 사건으로 지난 7월 29일 예심을 마쳤다.

혼잡한 법정 안팎
검은 옷의 방청객
색깔 다른 공판에 색깔 다른 방청객들
혼잡한 문 입구는 경찰들이 감시
경관 4명이 문앞을 경계


이른 아침부터 모여드는 방청자들이 재판소 넓은 마당을 둘러싸고 바로 지금 무슨 일이나 일으킬 듯이 이쪽저쪽에서 법정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10시반이나 되어 경찰 4명이 7호 법정문 입구를 막아서고 몰려드는 방청객을 차례로 들여보내려고 하였으나 워낙 많은 사람이 오자 앞뒤를 가리지 못해서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경찰이 뒤로 달려와서 끌어내는 등 한동안 그 혼잡한 모양은 표현하기 어려웠다. 모처럼 색다른 공판을 구경하려고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태반이나 섭섭한 얼굴로 굳이 닫힌 문만 쳐다보고 섰다가 가끔 문이 열리는 틈을 타서 서로 밀치고 법정으로 밀려드는 사람도 많았다. 넓은 법정 안은 입추의 여지도 없었고 방청석에는 검은 옷 입은 주의자들이 많이 섞여 법정 안은 보이지 않는 검은 빛이 흐르고 있었다. 피고석에는 오랫동안 철창생활로 초췌해진 9명이나 되는 많은 피고가 오래간만에 세상 사람들의 얼굴을 대하고 신기한 듯이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으며 변호사석에 이인 씨, 김용무 씨, 김기현 씨 등이 기록을 뒤지고 있었다.

제령 위반으로
공판 개정을 선언


11시경에 와키 재판장, 사토미 검사가 차례로 착석하여 먼저 다른 사건의 언도를 잠깐 마치고
경성부 봉익동 38 이철사 무직 이복원(24)
진남포 용정리 120 무직 한병희(23)
경성부 정동 1 곽철사 무직 곽윤모(24)
청주군 청주면 서천리 168 신염파사 무직 신영우(23)
진남포 부한두리 62 무직 이창식(25)
충주군 이류면 대창리 농업 서정기(28)
충주군 충주면 용산리 저술업 서상경(26)
논산군 연산면 화산리 120 농업 홍진우(29)
충주군 신니면 신청리 서철사 무직 서천순(25)
을 차례로 불러 세우고 주소와 성명 등을 조사한 뒤 재판장은 피고들에게 1919년 제령 제7호 위반에 대한 공판을 연다고 선언하고 피고 여러 사람에게 예심종결서 송달을 받았는가 물은 뒤 그 사실이 틀리지 않았는가 하고 차례로 물었다. 그러자 피고 중 곽윤모 한 사람이 틀리지 않았다고 대답하고 나머지는 모두 틀린다고도 하고 기억에 남아 있지 않는다고 하였다.

사실심문
이복원

(문) (먼저 피고 이복원을 불러 세우고 형벌 받은 전력이 있는지를 물은 뒤) 재산이 있는가?
(답) 나의 재산은 없소. 집 재산은 모르겠소.
(문) 종교는?
(답) 없소.
(문) 현재 무슨 단체에 참가하였는가?
(답) 현재 있는 단체에는 가담한 일 없소.
(문) 올해 3월부터 피고의 집에서 서천순 외 여러 피고와 모여 무정부주의에 대한 협의를 한 일이 있는가?
(답) 있소.
(문) 선전과 연구를 목적으로 하고 사상단체를 조직하려고 하였는가?
(답) 연구를 하려고 하였어도 선전할 목적은 없었소.
(문) 올해 4월 21일 낙원동에서 여러 사람과 흑기연맹을 조직한 일이 있나?
(답) 있소.
(문) 피고는 서정기를 아는가?
(답) 아오.
(문) 어떻게 알았으며 무슨 일을 의논한 일이 있는가?
(답) 올해 전부터 알았는데 흑기연맹에 대한 말을 없었소.
(문) 사상은 공감하는가?
(답) 공감하는지 안하는지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으나 다른 사람에게 들어 공감하는 줄은 알았소.
(문) 홍진우 등과 사상단체를 조직하자고 말한 일이 있었는가?
(답) 없었소.
(문) 홍진우와 흑기연맹을 조직하고자 말한 일이 있었는가?
(답) 그와 사상은 공감될 줄 알지만 여러 가지 사정상 단체에 참가하지는 못할 줄 알았소.
(문) 그 외 6명은 종종 수문사에 모여 단체 하나를 만들어 활동하자는 말이 있었지?
(답) 있었소.
(문) 5월 3일에 정동에서 흑기연맹에 대한 선언문을 기초하였는가?
(답) 처음에 내가 하다가 뒤에 신영우에게 맡겨 쓰도록 하였소. 그것이 경찰서를 통과하지 못할 것을 알고 고치려고 하였으나 고칠 틈이 없었고 그 취지에는 찬성하였소.
(문) 그것을 가지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에 게재하려고 가져갔었나?
(답) 그렇소. 그 원고는 내 손으로 써가지고 가져 갔었소.
(문) 정동에서 발기총회를 하자던 것은 잘 되었나?
(답) 이 모양으로 잡혔기 때문에 잘 되지 못하였소.
(문) 주의 주장을 선전하기 위하여 흑기연맹의 기관 잡지를 발행하려고 하였나?
(답) 흑기연맹과는 관계없는 어떤 잡지를 발행하려고 하였었소.

한병희
◇피고 한병희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일어났다.
(문) 재산은 얼마나 되는가?
(답) 한 2000원 되나 자세한 것은 모르겠소.
(문) 수문사와 흑기연맹에 대한 말을 하여 보라.
(답) 나는 수문사에 종종 놀러 다녔는데 한 번은 가니까 신영우가 무엇을 쓰고 있기에 그것을 나의 수첩에 적어두었고 무정부주의에 대한 연구단체를 만들려고 하기에 그에는 찬성하였으나 나는 서울에 있을 수 없는 형편이어서 발기인이 될 수 없다고 하였소.
(문) 흑기연맹의 기관 잡지를 발행하려고 200원 가량 준비하자는 것을 이복원은 부인하는데 피고는 들었나?
(답) 누구에게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듣기는 하였소.

미술에 사상연구
재판장은 익살까지 부려

곽윤모
(문) (다시 피고 곽윤모를 불러 세우고) 피고는 어려 학교에 다닌 모양인데 무슨 전문 분야를 좋아하나?
(답) 중학교는 여러 곳에 다녔으나 전문 분야는 미술학교에 다녔소.
(문) 그림 그릴 줄 아는가?
(답) 그림이 아니라 조각과에 다녔소.
(문) 미술학교에서 사상연구를 하는가?
하고 재판장이 묻자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지고 피고도 웃어버린다.
(문) 홍진우 서천순과 친한가?
(답) 친하오.
(문) 그 사람들과 무슨 단체 조직에 대한 말이 있었는가?
(답) 홍진우와는 별로 말한 일이 없고 서천순과는 말한 일이 있소.
(문) 4월 21일에 작정한 선언 강령을 5월 3일 총회에서 개정할 수는 있지만 흑기연맹은 벌써 21일에 성립된 것이 아닌가?
(답) 우연히 의논이 일치하였을 뿐이지 성립되었다고는 볼 수 없겠지요.

신영우
(문) (다음으로 피고 신영우를 불러 세우고) 학교에서 무엇을 하겠다는 희망이 없었나?
(답) 어학을 배우고 싶어하였소.
(문) 고등학교에 입학하고자 하였나?
(답) 고등학교 문과에 입학하고자 하였소.
(문) 문과면 순문학을 연구하려고 하였는가? 주의 방면의 문학을 연구하고자 하였는가?
(답) 별로 작정하지는 않았소.
(문) 흑기연맹의 취지서를 기안하였나?
(답) 기안하였소.
(문) 그 기안에 쓰여 있는 내용에 다른 여러 피고들이 공감하는가?
(답) 그 기안을 복안으로 발기총회에 제출하려고 하였으므로 다른 사람들과 충분히 토의하여 보지 못하였소.
(문) 종교는?
(답) 없소.
(문) 사상단체에 가입하였는가?
(답) 가입한 곳이 없소.

이창식

(문) 재산은?
(답) 없소.
(문) 원산 어느 학교에서 교사 노릇을 하였나?
(답) 산수와 일어를 가르치고 있었소.
(문) 육영에 대하여 의견이 없는가?
(답) 경험이 별로 없어서 이렇다 하는 의견이 없소.
(문) 흑기연맹이라는 이름은 별 문제로 하고라도 21일 파고들이 어떤 단체를 조직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은가?
(답) 그렇게 볼 수 없겠지요.
(문) 피고들 중 6명이 4월 21일에 모여 흑기연맹을 조직하자고 의견이 일치한 모양이던데 그 이외의 피고 3명은 흑기연맹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답) 그 중에서 서천순의 말은 들었으나 그 외 2명의 말은 듣지 못하였소.
이때 재판장은 나중에 자세한 것을 묻겠다고 하고 자리에 앉힌 뒤

흑자와 피고 관계
피고도 웃고 방청객도 웃음


서상경
(문) (서상경을 불러 세우고) 도쿄에서 흑룡회 회원으로 있었나?
(답) 그렇소.
(문) 피고의 호가 흑영인가?
(답) 그렇소.
(문) 흑룡회원으로 흑영이라 하니 피고와 검은 것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자 피고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문) 흑기연맹에 대하여 피고는 다른 사람 말과 틀리는 점이 없는가?
(답) 다른 사람들의 말과 대개 같소.

홍진우
(문) 대전에서 노농동지회를 조직하였는가?
(답) 조직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 회의 위원이었소.
(문) 노농동지회란 무슨 일을 하는가?
(답) 농민운동을 한다 합디다.
(문) 흑기연맹사건에 대하여 다른 피고가 말한 바와 다른 점이 없는가?
(답) 별로 없소.
(문) 서정기를 제외한 여러 피고들이 모여 흑기연맹을 조직하려고 하였다고 하니 그런가?
(답) 그렇지 아니하오. 나는 시골 가서 그런 것을 잘 모르오.

일사천리
피고 2명을 심문한 뒤
잠깐 휴식 선언


다음에 서천순이 두꺼운 도수안경을 끼고 일어서서 역시 흑기연맹 조직에 대한 문답을 한 뒤 서정기의 질문을 마치고 재판장은 잠깐 휴식을 선언하니 때는 12시 40분이었다. (다음은 내일 게재)

치안방해 우려로
공판 방청금지
변호사만 출석 계속


오후 2시 10분에 다시 공판을 열고 계속 심문을 선언한 뒤 즉시 와키 재판장으로부터 이후부터는 이 사건에 대한 문답이 공안을 방해할 우려가 있으므로 방청을 금지한다고 선언하여 변호사 이외의 모든 방청자를 내보냈다. 모두 가기가 싫은 듯이 법정 문밖에서 한참 동안이나 헤어지지 않고 서있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