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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법조계에 따르면 법원 내에선 젊은 판사들이 ‘일 때문에 개인의 삶을 포기할 수 없다’는 개인적인 신념을 이유로 야근이나 주말 추가 근무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고 합니다.
실례로 법원 인사 이동 후첫 회식에서 한 배석판사가 부장판사를 향해 “나는 육아를 해야하니 7시 이후엔 일을 못한다”고 선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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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라는 말을 아시나요? 골프장 코스 중 모래가 들어있는 움푹 파인 곳을 일컫는 말인데요. 판사들 사이에서 ‘벙커’란 자신을 힘들게 하는 부장판사를 가리키는 은어로 쓰입니다.
부장판사 입장에선 함께 일해야하는 후배들에 ‘벙커’로 찍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배석판사의 용감한 외침을 외면할 수 만은 없는 노릇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당당히 외치는 MZ세대의 특성은 판사라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검찰도 10년차 이하의 젊은 평검사들을 중심으로 워라밸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일고 있습니다. 과거 검찰 조직은 쌓여있는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밤새 일하는 게 당연시됐습니다. 지금은 한 부서 내 차장검사와 부장검사들이 야근을 돌아가면서 하는 등 전반적인 기류가 바뀌고 있다고 합니다.
최근 검사들을 상대로 진행한 양성평등 교육에서 한 부장급 검사가 젊은 남검사에 ‘기저귀 갈아본적 있냐’고 묻자 오히려 해당 검사가 ‘매일 가는데 무슨 소리냐’며 황당해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수년 전 한 검찰 간부가 퇴근 시간과 관련해 “오늘 퇴근하냐”고 물었던 사례에 비춰볼 때 큰 변화에 맞닥뜨린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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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현실 속에서 ‘내 삶과 가정, 건강을 포기하면서까지 일해야하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우리만 예외일 수 없다는 자각심이 드는 건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로 보이기까지합니다.
◇“워라밸 좋지만 사건 처리 지연은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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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판·검사들의 워라밸 문화 확산은 사건 처리의 지연, 그리고 소송 당사자들의 고충을 낳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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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변호사는 “법관 인사이동이 있었던 올해 2월 판결 선고가 잡혀 있었는데, 갑자기 변론 재개가 되고 담당 재판관은 이동을 했다”며 “최근 이러한 사례가 자주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변호사는 “새로온 판사는 기록 보는 것도 정신 없는데 변론재개 사건까지 있으면 바로 판결을 내릴 수 없다. 그러면 아무리 빨리도 6월부터 선고가 나기 시작한다”면서 “2월에 선고가 날 것이라 기대했던 소송 당사자들로선 4, 5개월 이상 연기가 되니 불만이 상당하다”라고 토로했습니다.
사건 처리가 늦어지는 건 로펌 입장에서도 손해입니다. 재판이 하염없이 미뤄지는데 새로운 사건이 몰려오면 업무가 쌓이게 되고 변호사들에겐 부담이 됩니다. 게다가 기존 사건이 처리되지 않는 상태에서 새로운 사건을 공격적으로 수임하기 어려운 노릇입니다.
판·검사들도 사건처리 지연에 대한 소송 당사자들의 불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판사들이 성실한 사명을 갖고 사건 처리를 빨리 해야한다는 국민들의 기대감이 있으니 대외적인 신뢰도나 평판을 생각하는 판사들은 고민이 있을 것”이라며 “구조적인 해결이 필요하다”라고 조언했습니다.
게다가 판사들은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를 폐지한 까닭에 굳이 야근까지 하면서 일할 명분이 더욱 사라졌습니다. 검사들 역시 검경수사권 조정 시행으로 검사로서 갖고 있던 기존 권한이 많이 사라진 상황에서 무턱대고 ‘사명감’을 강요할 순 없게 됐습니다. 오히려 검경수사권 조정 시행을 앞두고 야근하는 문화가 사라질 것이라며 반기는 검사도 있었습니다.
인력 사정이 나은 검찰에 비해 법원의 법관 부족 사태는 심각합니다. 법원행정처는 법관의 업무 부담을 덜기 위해 법조 일원화 정책에 따라 법관 임용시 필요한 최소 법조경력을 5년으로 낮추는 방안을 추진 중입니다.
하지만 “경력요건 완화는 사회적 경험과 연륜이 있는 법관으로 임용하는 법원개혁 취지에 반대된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법조계 모두의 고민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서울=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