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괴담으로 보는 ‘역병의 시대상’
조선시대 사람들은 ‘석조약사여래좌상’(왼쪽 사진)과 ‘대신마누라도’(오른쪽 사진)를 보며 역병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려고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조선시대 ‘대신마누라도’는 머리에 가채를 올린 푸근한 인상의 귀부인을 연상시킨다. 대신마누라는 이 시대 최악의 역병이던 호구마마(천연두)를 물리치는 신으로 여겨졌다. 병과 고통에서 중생을 구원하는 약사여래를 묘사한 ‘석조약사여래좌상’도 백성들이 감염병의 공포를 이기는 수단이 됐다.
두 유물은 팬데믹 와중이던 지난해 5월 열린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선, 역병에 맞서다’ 전시에서 공개됐다. 이 전시에는 1774년 무과 합격자 18명의 초상화를 모은 등준시무과도상첩(登俊試武科圖像帖)도 나왔다. 18명 중 3명의 초상화에서 천연두를 앓은 얼굴 흉터가 확인될 만큼 천연두는 조선 사회를 휩쓸었다. 조선시대 역병에 대한 두려움은 괴담으로도 발전했다. 괴담에는 역병에 대한 인식과 대처 등 조선시대의 사회상이 담겨 있다.
조선 광해군 때 문신 유몽인(1559∼1623)이 17세기 초에 저술한 어우야담(於于野譚)에는 유생 박엽의 역병에 얽힌 괴담이 실려 있다. 1594년 4월 박엽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지방으로 피란을 떠났다가 한양으로 돌아왔다. 옛집은 쑥대밭이 돼 있었고, 거리는 굶거나 역병에 걸려 죽은 시신들로 가득했다. 정처 없이 떠돌던 박엽은 밤거리에서 선비 집안의 미녀를 만났고, 그의 집에서 술에 취해 잠들었다. 다음 날 잠에서 깬 박엽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옆에 어젯밤 만난 미녀의 시신이 누워 있었던 것. 집안 곳곳엔 미녀 가족들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정신을 차린 박엽은 관을 갖춰 시신을 수습한 후 제사를 지낸다. 박엽 괴담에는 전란 후 역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간 백성들의 참혹한 현실이 그려져 있다.
조선후기 야담집인 청구야담(靑丘野談)에는 역병을 퍼뜨리는 외다리 귀신이 비를 피하기 위해 ‘도롱이와 방립’을 입은 채 한 여성을 쫓는 괴담이 수록돼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이유의 괴담에서는 역병이 귀신으로 형상화됐다. 박수진 성결대 강사는 논문 ‘조선후기 야담집에 나타난 역병의 형상화 양상과 그 의미’에서 “역병을 귀신 이야기로 그려 인간이 귀신을 쫓아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역병 같은 문제를 개인들이 직접 해결한다는 것이다. 현혜경 한경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는 “기근, 질병처럼 국가가 해결해야 할 대규모의 사회 문제가 괴담을 통해 개인적 차원에서 비현실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이 모색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