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해 한복판 작은 섬 델로스는 신화 속 아폴론 신의 탄생지로 등장한다. 기원전 478년∼기원전 454년 델로스 동맹의 해군기지 역할을 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정의로운 사람’ 아리스티데스(기원전 약 530년∼기원전 467년)의 이야기도 그중 하나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아리스티데스를 “아테네인들 중 가장 훌륭하고 가장 정의로운 사람”으로 평가했다. 정치가들의 업적 평가에 매우 인색했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조차 그를 칭찬했을 정도다. 이들은 당대 정치가들이 정의와 절제를 무시한 채 “항구들과 조선소들, 성벽들, 공물들과 같은 하찮은 것들로 나라를 가득 채웠다”고 비판하면서도 아리스티데스는 예외로 여겼다. 권모술수가 가득한 현실정치에서 그는 어떻게 정의를 실천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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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당한 영웅 아리스티데스
아리스티데스는 마라톤 전투에서 처음 역사의 기록에 등장한다. 기원전 490년, 대제국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했다. 다리우스 대왕은 제국의 영토에 거주하던 그리스인들의 반란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그리스 본토에 군대를 파견했다. 1000개에 이르는 작은 나라에 흩어져 살던 그리스인들은 허겁지겁 연합군을 꾸려 마라톤 평원에서 적군을 맞았다. 아테네군의 지휘는 밀티아데스가 맡았다. 하지만 군대 운영이 쉽지 않았다. “항상 최고가 되고 남보다 뛰어나거라”라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긴 장군들은 협력 아닌 경쟁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리스티데스가 협력을 끌어냈다. 그는 밀티아데스 못지않은 실력자였지만 지휘권을 그에게 넘기면서 “지혜로운 사람들을 믿고 따르는 것은 수치가 아니라 고귀하고 안전한 길”이라고 동료들을 설득했다. 그러자 나머지 장군들도 아리스티데스를 따랐다.
마라톤의 승리 직후 아리스티데스는 최고 통치자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썩 인기 있는 정치가는 아니었다. 남의 힘으로 얻는 권력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았던 그는 항상 사람들을 경계하고 조심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태도는 경쟁자 테미스토클레스의 행보와 달랐다. 정의보다 권력을 추구한 이 영리한 정치가는 각종 특혜를 베풀면서 자기 사람들을 끌어 모았기 때문이다. 누가 경쟁에서 이겼을까?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리스티데스가 민주제도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왕국을 건설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경쟁자 축출에 성공했다. 아리스티데스는 권력 독점을 막기 위해 도입된 도편추방제도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 제도에 따르면 6000명 이상의 시민들이 지목한 사람은 추방을 당해 10년 동안 고향을 떠나야 했다.
기원전 483년 아리스티데스의 도편추방 때 사용된 도편. ‘아리스티데스 뤼시마코스의(아들)’이라고 적혀 있다. 아테네 아고라 박물관 소장
동맹국의 마음 얻어낸 공정함
만일 페르시아의 제2차 침공이 없었다면 아리스티데스는 10년 동안의 떠돌이 삶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원전 480년, 새로 왕위에 오른 크세르크세스는 아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해 직접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재침공했다. 영화 ‘300’의 배경이 된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의 용사들이 수만 명의 적군에 맞서 옥쇄작전을 펼쳤지만 역부족이었다. 아테네인들도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적군에게 도시를 비워주고 남쪽의 작은 섬 살라미스로 도피했다. 그리고 그곳의 해전에 그리스의 운명을 걸었다. 살라미스 해전은 그리스의 ‘명량해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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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리스티데스의 정의가 가장 크게 빛난 것은 델로스 동맹을 체결할 때였다. 살라미스 해전 뒤 시급한 과제는 페르시아 잔류 군대를 완전히 축출하고 재침공에 대비한 방어망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아리스티데스는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에 남겨둔 30만의 군대를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물론 경쟁국 스파르타도 가세했다. 그 결과 전후의 패권을 놓고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다툼이 임박해 보였다. 하지만 동맹국들의 마음은 쉽게 아테네 쪽으로 기울었다. 그들은 강압적인 태도를 보인 스파르타가 아니라 아리스티데스의 공정함에 신뢰를 두었기 때문이다. 동맹국들에 결정을 위임받은 아리스티데스는 각 나라의 영토와 수입을 조사해 동맹 분담금을 공평하게 나누었다.
현대 정치에 던지는 질문 ‘정의’
미국 보스턴시 비컨힐에 있는 아리스티데스의 동상.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정의로운 영웅이 죽었을 때 가족은 장례비용조차 마련할 수 없었다고 한다. 후손들이 국가의 보조금에 의지해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플라톤이 쓴 ‘고르기아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불의를 저지를 수 있는 큰 권세를 가졌는데도 평생 정의롭게 산다는 건 대단히 칭찬받을 만한 일”이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 사람들은 몇 안 되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이곳에서도 나왔고 다른 곳에서도 나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누가 무엇을 맡겨도 그것을 정의롭게 처리해 내는 능력으로서의 덕이 훌륭하고 뛰어난 자들 말이네. 아리스티데스가 바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다른 모든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높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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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