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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2021/단편소설 당선작]밸런스 게임

입력 | 2021-01-01 03:00:00


많은 일요일들을 지나왔다고 윤은 생각했다. 징검다리 같은 일요일들에는 아들과 그녀, 단둘뿐이었다. 심지어 택배기사도 찾아오지 않는 요일이라고 윤은 베란다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며 생각했다. 곳곳의 구멍 뚫린 방충망 사이로 총알 같은 햇빛이 들어왔다. 지난여름 술 취한 남자가 화단을 넘어 우산의 물미로 방충망을 내리찍는 일이 있었다. 어떤 흔적들은 오래 두고 본다고 해서 그 공포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장마가 시작되면 곳곳의 물웅덩이에 모기들이 알을 깔 것이다. 그 전에 방충망부터 수리해야겠다고 윤은 마음먹었다.

오래된 아파트 일 층이었고, 6월이면 작약이 피는 작은 화단이 있었다. 윤은 방충망을 열고 숱을 쳐낸 머리카락을 쏟았다. 아들 건희는 이제 사학년이 됐고 부쩍 키가 자랐다. 지난여름에는 건희의 살이 좀 더 물렀다. 꽉 잡았다 놓으면 물기를 많이 머금은 수박처럼 발그레하게 번지던 손목이 이제는 제법 단단해지고 검은빛을 띠었다. 불과 일 년 만에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윤은 생각하지 못했지만, 건희는 그랬다.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건희는 웃자랐고 표정은 단단해졌다. 바람직한 방향성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윤은 가끔 무른 건희가 그리웠다.


그 날 이후 모든 게 미세하게 변했다.

장래 희망란에 건희는 무조건 힘센 사람이라고 적었다. 힘센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건희는 못된 아이가 됐다. 단지와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윤은 가끔 그 전으로 돌아가면 어떨까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티브이를 보던 건희가 일어나서 발바닥을 털었다. 먼지와 부스러기들이 떨려 나왔다. 청소에서 손을 뗀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설 때 윤은 발을 헛디뎌 휘청거렸다. 마트 매대 사이에서도 윤은 자주 그랬다. 윤은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는 함정이 있다고 믿었다. 음모론을 믿었다. 오랫동안 사용한 접시에 이가 나간 것을 발견했을 때, 복도를 다 지나갈 때까지 센서 등이 켜지지 않을 때, 지갑에서 사라지는 돈의 액수가 점점 커질 때, 한 치수 크게 산 건희의 운동화가 꽉 낄 때, 양말들이 한 짝씩 사라질 때, 구형 통돌이 세탁기 뒤에 고인 어둠과 하수구 냄새를 손으로 휘저어 사라진 것들의 행방을 찾을 때마다.

공용현관으로 나오자 흰빛과 분홍빛이 그러데이션으로 핀 작약이 화단에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다. 올해는 유난히 더 풍성했다. 떨어진 꽃잎은 이내 누런색에서 검은색으로 시들었다. 처음 작약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윤은 작고 약한 어떤 것을 떠올렸다. 매년 좁지만 작은 화단의 검은 흙들이 떨어진 꽃잎의 분홍을 순식간에 빨아먹는 것 같아 섬뜩했다.

윤은 숄더백 안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집을 나서기 전 책 사이에 윤은 흰 봉투를 끼워 넣었다.


학교에서 연락이 온 건 금요일 오후였다. 평일은 마트 일이 바빠 일요일밖에 시간이 없다고 윤은 둘러댔다. 담임은 기다렸다는 듯 어차피 당직이라 괜찮다고 했다. 윤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시든 시금치 단에 할인 바코드를 붙이며 얼굴을 찌푸렸다. 윤은 핸드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우고 손은 바삐 움직였다. 한동안 대치하듯 담임은 아무 말이 없었고 윤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감사하다는 담임의 말에 고집을 피우는 애인에게 마지못해 져 준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담임의 호출은 이번이 여섯 번째였고 더는 미룰 수가 없기도 했다. 전화를 끊고 윤은 처음 붙인 바코드 위에 새 가격표를 붙였다. 생물은 시간이 지나면 가격이 추락했다. 바코드를 다섯 번까지 붙이는 일도, 상한 것들을 골라내고 재포장하는 일도 있었다. 윤은 손바닥을 비벼 마른세수를 했다. 깨끗한 피부는 타고난 거라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자신이 없었다.

그날 윤은 퇴근길에 동네 책방에 들러 책 한 권을 샀다. 여러 번 지나쳤지만 막상 서점의 문을 열고 들어간 건 처음이었다. 윤은 내용은 보지도 않고 제목과 표지가 단정한 책을 사서 얼른 책방을 나왔다.


윤은 담임과 시간 약속을 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집을 나서고 나서야 알았다. 전화를 할까 했지만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학교에 가서 안 되면 그때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을버스는 좁은 서랍을 부려놓은 듯 사람들로 가득했다. 다음 주까지 징검다리 연휴를 몰아쉬는 곳이 많았다. 차는 자꾸 밀려서 너울성 파도를 넘듯 중간중간 자주 멈추고 달리기를 반복했다. 교복을 입은 예쁘장한 여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블라우스 단추가 가슴 부위에서 약간 벌어져 있었다. 교복만 아니었다면 전혀 아이로 볼 수 없는 성숙한 얼굴이었다. 윤은 그 나이 때 자신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잘 생각나지 않았다. 아이는 비좁게 선 사람들 사이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저 아이는 뭘 보고 있을까?’

아이는 푸른 잎을 펄럭이는 가로수보다 높은 곳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꺾고 더 높이. 윤은 아이의 시선을 쫓았다. 증권사 빌딩 꼭대기에 송전탑을 발견하고 윤은 반가웠다. 하지만 이내 윤은 아이가 보는 게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작고 녹슨 송전탑. 수신이 끊긴 지 오래인. 그건 마치 윤의 인생 같았다.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아이가 볼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늘을 보는 거겠지. 꿈꾸듯 뭔가 나른하고 게으른 꿈을 꾸던 때가 윤에게도 있었던 것 같았다. 이후 뭔가를 꿈꾸지만 잘 안 될 가망성이 더 많은 나이가 기다리고 있겠지. 저 아이 앞에도. 윤은 안쓰러운 마음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아이를 향한 것인지 몰라 잠시 당황스러웠다. 그런 것들과는 아무 상관없이 아이는 어느새 자리를 잡고 앉아 태연하게 핸드폰을 보며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오늘도 예쁘고 내일도 예쁠 것이었다. 윤은 누가 더 안쓰러운지 확실해졌다고 생각했다.

“늦어?”

윤을 보지도 않고 티브이에 시선을 둔 채 건희는 그렇게만 물었다. 거실로 쏟아진 햇빛이 맑은 개울물처럼 찰랑거렸다. 빛바랜 나이키 티셔츠를 입고 소파에 앉은 건희가 거기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윤이 아니, 안 늦어, 라고 말하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티셔츠 한가운데에 적힌 fear of god이라는 글자가 대답 대신인 것 같았다. 윤은 학교에 간다고 말하지 않았다. 볼 일이 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아니, 늦을지도 몰라. 늦을 거야.”

윤은 뭔가에 쫓기듯 다급하게 다시 말했다. 일부러 그래 줘야만 할 것 같았다. 윤과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말수도 줄었지만 그럴 나이였다. 부모 몰래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는 나이. 건희가 오늘은 좀 더 티브이를 많이 볼지도 모르겠다고, 얌전히 앉아 배고픈 줄도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물속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윤은 생각했다. 먼저 이혼한 걸로 선배라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명애는 우리는 평생 내가 나를 먹여 살려야 하는 팔자라고 했다. 셀프 가장이라고도 했다. 지레짐작한 명애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윤은 이혼한 적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이가 대부분의 시간에 혼자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바쁜 윤은 건희가 아주 어릴 때부터 티브이를 틀어줬다. 잠깐 이거 좀 보고 있어. 윤은 잠깐이라고 생각했지만 건희는 일기에 티비는 내 친구, 라고 적었다. 글씨체가 아이답지 않게 단정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교문에는 빛바랜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학교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놀이터입니다. 정문 오른쪽으로 모래를 깐 저학년 놀이터가 있었다. 놀이터 둘레에는 폐타이어들이 반쯤 파묻혀 경계를 세우고 있었다. ㄱ자 건물에 가린 모래 놀이터와 달리 대운동장은 학교 중심에 있었다. 트랙들과 마른 흙들이 햇빛을 받아 바짝 말라 있었다. 아이들 몇이 가방을 골대 앞에 던져두고 축구를 하고 있었는데 키가 모두 제각각이었다. 윤은 그 가운데 한 명쯤 건희를 아는 아이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으로 아이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아무리 봐도 그중 누가 건희를 알까? 알아낼 수 없는 수수께끼 같았다. 건희는 한 번도 친구를 집으로 데려온 적이 없었다. 친한 친구의 이름을 물으면 그냥 다 친하다고만 했다. 학교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안 했다. 마트로 학부모 모임을 끝낸 엄마들이 장을 보기 위해 몰려온 적이 있었다. 라면과 냉동식품 코너 사이를 무리 지어 다니며 남자애들은 원래 그래, 라고 했다. 윤은 이벤트 매대를 정리하다 그 말을 듣고 안심이 됐다. 그리고 윤은 그날 또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남자애들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못 해. 껌을 씹고 계단을 못 올라가.”

엄마들이 함께 웃었다. 윤도 표시 나지 않게 따라 웃었다. 웃다가 순간 멈췄다. 윤은 평일의 참관 수업이나 면담, 학부모 모임에 가지 않았다. 청과 담당인 윤은 마트에서 로컬 푸드가 입고되는 오전 타임을 빼기가 곤란했다. 애초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거북했다. 올해 초 마트는 주 35시간 근로시간 단축을 시행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휴게시간 단축이라는 꼼수가 있었다. 익산이 고향인 점장은 배려가 사람들을 다 베린다며 근무 중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못마땅해했다. 그래서 윤은 일을 하는 동안에는 물을 마시지 않았다. 자주 목이 말랐지만 배려가 아닌 권리를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건희는 늘 괜찮다고 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몇 달 전 명애가 반에서 건희만 보호자가 오지 않았다고 들은 말을 해줬다. 요즘은 대부분 양쪽 부모가 다 온다, 하나도 아니고 둘 다, 무슨 병풍처럼 서 있는다고 명애는 억울한 듯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윤은 갑자기 얼굴이 붉어져서 싹이 난 감자를 골라내고 재포장하는 일을 엉망으로 하고 말았다. 건희의 뒤에서 수군거렸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건희는 한 번도 교실 뒷문을 쳐다보지 않았을 것이다. 괜찮다고 했으니까. 혹시 내내 뒷문을 신경 쓴 게 아닐까? 저 중 한 아이는 그 모습을 목격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건희를 놀렸을까? 누구일까? 윤은 싹이 난 감자를 골라내듯 그 아이를 찾아내 혼을 내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일으킨 흙먼지가 가라앉자 운동장을 가로질러 젊은 남자가 윤을 지나쳤다. 통화를 하며 급하게 교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딘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지만 어디서 만났는지 알 수 없었다. 마트 단골손님이겠지. 바다색 폴로셔츠에 상아색 면바지를 입은 그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윤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문에는 외부인 출입 금지 안내판이 걸려 있었다. 윤은 아들 건희가 매일 아침 이 안내판을 보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처음 담임의 전화를 받고 느꼈던 거북한 감정들이 떠올랐다. 이번 통화에서 담임은 용건을 말하지 않고 학교로 오실 수 있냐고만 물었다. 커터 칼로 여자아이의 머리카락을 잘랐다던가, 체육 시간에 다른 아이에게 나무에 올라가라고 부추겼다던가, 비싼 물건을 말도 없이 빌려 갔다던가 하는, 아들에게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는 말도 작은 사고가 있었다는 말도 없었다. 윤은 아들 건희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학교의 외부인이 돼 버린 건 아닌지 더럭 겁이 났다. 여기까지 와서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그런 윤의 등을 떠밀 듯 운동장에서 단단한 사탕을 깨무는 것 같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건희를 데려올 걸 그랬다 싶었다. 상담을 하는 동안 운동장에서 어쩌면 친구일지도 모를 아이들과 놀게 할 걸.

오늘처럼 건희를 혼자 기다리게 하는 일이 많았다. 잠깐 있어. 엄마, 금방 갔다 올게. 그리고 사탕을 줬다. 점점 사탕을 더 많이 요구하는 어린 건희에게 녹여 먹어, 라고 말했다. 건희의 유치는 시커멓게 썩어 들어갔다. 마치 자기 몫의 인생을 녹여 먹으라는 듯 왜 그랬을까? 다 시든 잎의 가장자리만 조금씩 떼서 가지라고, 한꺼번에 와락 깨 먹는 즐거움도 있다는 것을 왜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윤은 다시 운동장으로 돌아나가고 싶지 않았다. 외부인 출입 금지 팻말이 있더라도 앞으로 나가야 했다. 그런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건희와 오롯이 둘만 남겨졌을 때 윤은 다짐했다.


“정 선생을 만나러 오셨지요?”

교무실이 아닌 나란히 붙은 교장실 문이 열렸다.

“네, 4학년 건희 엄마입니다.”

윤은 뒤늦게 안녕하세요, 라고 덧붙였다. 타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목이 말랐다. 그는 자신이 이 학교 교장이라고 말했다. 정 선생이 급한 일이 생겨 방금 전에 나갔다고 했다.

“못 보셨어요?”

윤은 방금 전 교문을 나간 남자를 떠올렸다. 익숙함은 목소리 때문인 것 같았다. 친절하고 따뜻한 목소리, 용기를 내세요, 윤은 뒤늦게 얼굴이 붉어졌다. 서서히 퍼지는 열망에 차가운 물을 붓는 것처럼 윤에게 교장은 좀 들어오세요, 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윤은 어떤 감정을 들킨 것 같아 조바심이 일었다. 교장은 전체적으로 체구가 작고 말랐다. 걸을 때마다 바지 밑단이 펄럭거렸다. 몸이 아니라 뼈를 넣어둔 것 같았다. 얼굴이 파리했고 피곤해 보였는데 일요일이라 그랬는지 수염을 깎지 않아 더욱 부스스했다.

교장실에 윤을 혼자 두고 나가 그는 커피를 타 왔다. 윤은 뚱뚱한 벽돌색 가죽 소파가 마주 보고 있는 교장실이 불편했다. 열린 창문으로 여전히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가 질 때까지 어쩌면 해가 지고 나서도 운동장을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언젠가 학교 운동장에는 졸업을 하지 못하고 죽은 아이가 밤마다 그네를 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밀어주는 사람 하나 없이 오지 않는 친구들을 기다리며 혼자 그네를 타는 아이. 그 아이의 마음을 왠지 알 것도 같았다. 왜? 알 것 같지? 알지 말지. 그런 것. 누구도 영원히 알지 못했으면 하는 것들이었다.

“혼자 아이를 키우신다고요?”

교장은 연민도 동정도 없이 말했다. 윤은 그런 걸 어느 정도 기대했다. 그렇다면 일이 좀 더 수월해질지도 몰랐다. 윤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교장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윤을 쳐다보는 시선이 묘하게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태도였다.

건희는 학교 토끼장에 개를 집어넣었다.

“본교 아이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장소였지요.”

윤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학교에 토끼가 살았다는 것도 몰랐고 개가 함께 살았다는 것도 몰랐다. 당연히 건희가 학교에 따로 떨어져 살았던 토끼와 개를 한 우리에 집어넣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리고 이 일이 어떤 의미인지, 이 사건의 크기가 얼마만큼인지 몰라 당혹스러웠다.

“누가 다쳤나요?”

교장은 한참 뜸을 들인 뒤 말했다.

“죽었죠.”

윤은 순간 검은 물이 울컥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가방 안에 든 책과 책 속에 든 흰 봉투만으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명애는 아무도 모르게 담임의 책상에 놓고 나오면 된다고 말했다. 요즘도 그래? 너는 그런 적 있어? 라는 말에 우리 애는 잘하잖아, 라고 말했다. 윤은 우리 애는 잘한다는 비교에 화가 났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사실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두려웠다.

“…… 죽었죠. 토끼가 두 마리나.”

윤은 어렸고 뭘 몰랐다. 학부모 모임 같은 데를 빠져도 된다고 생각할 만큼 윤은 자신이 허술하고 만만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일들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싶지 않아서, 들키고 싶지 않아서 윤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한 곳의 놀이터에서 엄마들과 친해지지 않았고 가진 것보다 더 가지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토끼가 죽어서 다행인가 보군요.”

윤은 목이 말랐다. 떨리는 손으로 물 대신 커피를 마시다 그를 쳐다봤다. 그럼 다행이 아니란 말인가? 불쌍한 토끼들이 떠올랐지만 그럼에도 윤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행은 다행인 거였다. 교장은 윤을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자 당연하다는 듯 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자세한 이야기는 정 선생이랑 나누세요, 라며 손사래를 쳤다. 집으로 돌아가면 건희가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가 이내 묻지 말아야겠다고 고쳐먹었다. 이유가 있었겠지. 재미로 그런 일을 할 아이는 아니라고 믿었다. 아니, 재미로 그런 일을 할 수도 있는 나이라고 생각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모른 채. 결과는 너무 까마득해서 시작만 하기에도 바쁜 나이였다.


교장실을 나와 교무실 안을 들여다볼 때 교장은 윤을 다시 불러 세웠다.




“시간이 되면 이것 좀 보고 가세요!”

목소리가 너무 차갑고 날카로워 윤은 놀랐다. 담임을 만나고 싶었다. 한동안 윤은 하루 종일 댓글만 보던 때가 있었다. 같은 뉴스에도 극명한 온도 차가 있었다. 담임이라면, 그는 좀 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았다. 지난봄 담임은 건희의 일기장에 용기를 내세요, 라고 적어두었다. 일기는 엄마가 울었는데 아무래도 이유를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이후로 윤은 담임의 전화를 받는 것이 즐거웠다. 담임은 건희가 아주 예쁜 아이라고 말했다. 사랑이 많은데 표현이 서툴러서 쉽게 오해를 받는다고 말이다. 윤은 일부러 담임을 만나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끝도 없이 듣고 싶었다.

담임과의 통화가 길어질수록 건희가 이런저런 말썽을 부려도 싫지 않았다. 윤은 오히려 기다리기까지 했다. 윤은 담임의 전화를 받은 날이면 건희에게 잘했어, 라고 말해줬다. 잘했는데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라고 말했다. 건희는 곧잘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잘했어, 라는 말을 해줄 수 없을 것 같았다. 건희에게도 자신에게도. 건희가 더 큰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아직 담임의 이해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교장이 윤을 데리고 간 곳은 최근 새로 지은 학교 체육관 앞이었다. 작은 연못이 있었고 주차장으로 아이들이 돌발적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화단 둘레로 울타리용 나무를 심어 놓았다. 휴일인데도 주차된 차가 있었다. 병설 유치원의 노란색 버스가 가장 끝에 주차돼 있었다. 교장이 멈춰선 곳은 건물 외벽과 붙은 사육장이었다. ‘달방앗간’이라는 나무 팻말이 달랑거렸다. 토끼장 안에는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작은 통나무를 깎아 만든 물통이 있었다. 윤이 들여다보니 이단짜리 케이지는 비어 있었다. 교장은 사건 현장을 보여주려고 윤을 부른 것이었다. 폴리스 라인과 어지러운 핏자국, 오 년 전에도 건희는 그곳에 있었다.

엄마 토끼 키워도 돼요? 몇 달 전 건희는 그렇게 말했고 윤은 고개를 저었다. 윤은 이제 자신이 뭔가를 잘 못 키울 것 같았다. 너무 귀여워요, 건희는 아쉬운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다.

“동물을 키워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그렇다면 잘 모르시겠구나. 책임진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에요.”

교장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윤은 교장이 있는 곳에서 한 발짝 떨어져 그의 등을 쳐다봤다.

“저는 여기가 무덤 같습니다. 그 아이들이 생각납니다. 눈이 빨갛고 하얀, 털들이 북실처럼 온몸을 감고 있었지요. 토끼를 실제로 본 적이 있으세요?”

윤은 교장이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하는지 몰랐다.

“토끼가 아니면 작고 약한 것들은요? 보신 적 있겠죠. 우리 주위에는 너무 많으니까요.”

교장은 추궁하듯 물었다. 그런 말들을 윤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기사에 달린 댓글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윤은 그 말들이 새삼 토끼의 잘린 다리 같았다. 피 같았고 뽑힌 털 같았다.

“아니요, 먹어 본 적만 있어요!”

너무 무섭고 당황해서 그런 말이 나왔다. 어쩌면 그런 적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저런.”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 번은 토끼 한 마리가 캑캑거리고 있는 거예요. 자세히 보니 토끼의 목에 뭔가가 걸린 것 같았습니다. 재빨리 귀를 잡고 입속에 손을 넣었지요. 털 뭉치가 나왔습니다. 토끼도 그루밍을 해요. 그러다 죽을 수도 있고요. 아이를 사랑하시지요? 그렇다면 더더욱 가르쳐야지요. 생명은 아주 하찮은 일에도 죽을 수도 있다고 말이에요.”

교장은 갑자기 돌아서서 어떤 교훈을 준다는 듯 윤의 어깨를 세게 잡았다 놓았다. 그러고는 가볍게 돌아섰다. 윤은 그도 댓글을 다는 사람일 것 같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었고 모두가 위로나 비난에 부지런했다. 아침마다 댓글에 대댓글이 쌓였다.

꽃잎이 쌓인 아파트 화단에서 아이는 동생을 잃었다. 만취한 운전자가 조금 더 핸들을 옆으로 돌렸다면 동생이 아니라 아이가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 그랜저 승용차는 보도블록 위를 조금 더 달리다 화단을 밟고 아파트 벽면에 부딪치고 나서야 멈췄다. 신물이 올랐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윤은 빈 케이지를 붙잡고 아침으로 먹은 된장찌개를 토했다.

윤은 도망치듯 학교를 나왔다. 이제 담임의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를 지나쳤고 모든 일이 너무 늦었다는 생각만 들었다. 집에 가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윤은 잠시 쉬고 싶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늦을 거라고 말했기 때문에 건희는 오래도록 티브이를 볼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윤은 학교 앞을 서성거렸다. 주변을 돌았다. 핫도그 가게는 문이 닫혀 있었다. 가게의 유리문에는 이름이 적힌 선불카드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학년별로 색깔이 다른 카드에 건희의 이름은 없었다. 건희는 이런 것들이 필요 없는 걸까? 윤은 한참 동안 카드에 적힌 이름 아래 적립된 금액과 차감된 금액을 봤다. 마트가 쉬는 날 들러 건희의 카드도 만들어야겠다고, 넉넉하게 오만 원을 충전해야겠다고 생각하자 배가 불렀다.

영어와 피아노 학원을 지나 윤은 계속해서 골목을 걸었다. 연립주택이 즐비한 낯선 골목에 들어섰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작은 과자점을 발견했다. 연립주택 일 층에, 따로 간판도 없었다. 활짝 열린 문으로 끈적한 설탕 냄새가 흘러나오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가게였다. 작은 테이블이 두 개 있었고 오픈 주방이었다. 색색의 마카롱과 휘낭시에, 에그타르트, 무화과 파운드케이크가 유리 선반 위에 진열돼 있었다. 주인은 매장 판매보다는 주문 위주로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손등이 부드러운 반죽색이었다. 윤은 무화과 파운드 한 조각과 커피를 시켰다. 케이크를 다 먹고 하얀 테이블 위의 부스러기를 손으로 모아 접시에 담을 때 맞은편 골목 모퉁이로 여자가 뛰쳐나왔다. 뒤이어 쫓아온 남자는 여자를 잡아 앉혔다. 한낮의 전봇대 앞에 불편한 자세로 쪼그려 앉는 남자와 여자가 이상하게 보였다. 이내 둘은 이 세상에 둘뿐인 듯 큰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죽을 거야!”

“안 돼!”

흥분한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듣는 것 같았고 윤은 그 말이 신기했다. 죽음도 허락을 구하고 또 반대도 할 수 있는 거라는 그 순진한 무기가.

“그럼 방법이 없잖아요. 하루하루가 지옥이에요. 알아요?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그런데 그거 알아요? 내가 무서우면 선생님도 무서워해야 할 거예요. 혼자만 당할 줄 알고!”

윤은 그제야 여자를 알아봤다. 버스에서 봤던 아이였다. 하지만 윤이 놀란 건 아이 때문이 아니었다. 연신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 윤을 지나쳐 교문 밖을 뛰쳐나가던 건희의 담임이었다. 바다색 폴로셔츠에 상아색 바지가 그대로였다.

‘……아!’

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한 죄책감을 그제야 털어버린 듯 순간 반가웠다. 반가웠다가 윤은 천천히 자신의 좁은 내부에서 어떤 기대가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느꼈다.

“나쁜 짓 할 생각 마! 내가 다 해결할 거야.”

“이보다 더 나쁜 짓이 어디 있어요? 풍선처럼 배가 커질걸요?”

햇빛을 많이 받고 단시간에 자란 것들이, 예쁘고 싱싱한 것들이 가장 먼저 상했다. 언제나 그건 사실이었다. 어둠의 재를 묻힌 감자나 당근 같은 것들은 비교적 나중에 할인 매대에 올랐다. 윤은 그제야 아이의 벌어진 블라우스가 파리하고 건조한 얼굴이 이해가 됐다. 아니, 건희의 담임일 리가 없었다. 교장이 지금까지 윤을 놀리고 있는 거라고, 착오가 있을 거라고 윤은 생각했다.

“우리 선생님 엄마 줄까요?”

지난달 담임과의 통화가 끝나자 건희가 말했다. 윤은 뭐? 라고 물었고 건희는 그냥, 이라고 말했다. 윤은 건희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라고 다시 물었고 건희는 단단한 표정으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요, 라고 말했다. 윤은 더럭 겁이 났다. 건희의 표정이 감자 싹처럼 검고 불길해서 윤은 애써 농담처럼 웃으며 그래, 그래라,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설마 그래서 건희가 토끼장에 개를 집어넣은 걸까? 윤은 불안했다.

“……미안해.”

“아니, 내가 더 미안해요.”

한낮의 폭죽처럼 화를 내던 둘은 이제 서로 무릎을 꿇고 앉아 울었다. 여자아이는 대성통곡을 했다. 주인 여자가 반죽을 밀다 말고 그 모습을 한동안 쳐다봤다. 계속될 것 같은 눈물은 또 어느 순간 뚝 그쳤다.

“우리 밸런스 게임해요.”

종잡을 수 없는 여자아이. 남자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둘은 서로의 눈물을 닦아 주고는 웃었다.

“여친 집에 다른 남자 속옷? 다른 남자 집에 여친 속옷?”

담임의 얼굴이 다시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됐다.

“친구 팬티 속에 내 손? 내 팬티 속에 친구 손? 토 맛 토마토? 토마토 맛 토?”

그가 목을 잡고 토하는 시늉을 했다.

“잘 생각해봐요. 그래도 해야 돼요.”

여자아이의 질문에 윤은 자신의 가방 속에 지나치게 단정한 책을 떠올렸다.

“자, 마지막! 뽀뽀하기? 뽀뽀 받기?”

“그건…… 둘 다.”

그 말이 신호처럼 둘은 입을 맞췄다. 윤은 고개를 돌렸다.

“우리 조금만 더 용기를 내자.”

윤은 놀랐다. 용기를 내자는 말에 이토록 반응하는 자신이, 그럼에도 그 말이 전혀 퇴색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 누군가에게 던지는 말랑한 위로이자 스스로에게 하는 단단한 다짐 같은 그 말을 윤은 자신의 딱딱한 혀 위에 한동안 올려만 두었다. 반죽 색깔의 손등이 밀고 당기는 흰 덩어리를 쳐다봤다. 밀당을 잘하는 여자아이. 시간이 지나자 오래 쪼그려 앉은 다리가 저린지 여자아이와 남자는 서로를 부축해 반대편 골목으로 사라졌다. 윤은 과자점을 나와 갔던 방법 그대로 돌아왔다. 마을버스를 탔다. 여자아이가 가볍게 벗어버린 마음을 자신이 챙겨온 것처럼 창밖을 봤다.

남편은 일요일마다 건희를 만나러 왔다. 올 때마다 반찬거리를 사왔다. 윤이 마트에서 일하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안 하던 짓을 했다. 검은 봉지를 윤에게 내밀었다.

“식탁에 올려 둬.”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남편은 윤이 일을 시작하는 걸 말렸다. 조금 더 있다 제대로 된 일을 찾아보라고 했지만 윤은 한사코 마트에 취직을 했다. 첫 한 달은 너무 좋았다. 조금 더 부지런하게 몸을 움직였고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았다. 아이들은 손을 잡고 아파트 안의 어린이집을 다녔다. 사고가 있던 날 윤은 조금 늦었다. 블랙데이 기간이라 한꺼번에 손님이 몰려왔고 카운터를 하나 더 열어 도와달라는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 바코드를 찍는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티브이를 보라고 했다. 만약에 엄마가 어린이집으로 너희들을 데리러 가지 못하면 동생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 잠깐만 티브이를 보라고. 윤은 아파트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리는 동안에도 아이들이 티브이를 보고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이런 죽은 것들 좀 사오지 마!”

검은 비닐에서 고등어의 피비린내가 확 끼쳤다.

“내가 밖으로 나돌아 다닐까 봐? 그러느라 애를 잘 못 챙겨 먹일까 봐?”

남편은 한 번도 윤을 원망한 적이 없었지만 그의 모든 행동은 그것과 다름없다고 윤은 생각했다.

“이제 오지 마. 건희는 밖에서 봐.”

윤의 남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면서 이제부터 잘 못 올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미안해, 라고도 했다. 윤은 시어머니로부터 그에게 여자가 생겼다는 얘기를 이미 들었다. 쾅,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집 안으로 한꺼번에 검은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점점 차올라 윤의 몸이 천천히 잠기는 것 같았다.


“임신한 개였어요.”

건희가 묻지도 않은 말을 내뱉었다. 혼자 있는 것보다 같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윤은 한참 후에야 이해했다는 듯 아주 어렴풋이 작게…… 아, 라고 말할 수 있었다. 지난여름 술 취한 남자가 작약 화단을 넘어 우산의 물미를 사정없이 내리찍는 일이 있었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 한 시간 가까이 윤과 건희는 어둠 속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온몸이 비 오듯 흐르는 땀으로 흠뻑 젖었다. 건희가 한 일은 그런 일이 아니었다. 건희가 가끔 그 일을 떠올리는지 묻지 않았다. 그 일이 아이의 인생을 바꾸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대신 윤은 건희를 데리고 편의점에서 색색의 츄파춥스 한 통을 샀다.

“엄마, 싸울 때 왜 사람들이 주먹을 쥐는지 알아요?”

fear of god, 그의 낡은 신이 말했다.

“왜?”

빈손이니까요, 펼쳐보면 빈손이지만 뭉치면 주먹이 된다고 말했다. 주먹이라도 내밀어야 해요. 불쑥 윤에게 주먹 쥔 손을 내밀었다. 순간 윤은 깨달았다. 아이는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매번 주먹을 날렸고 점점 나쁜 아이가 됐다.

윤은 오랫동안 신의 물음에 대한 답을 생각했다. 그들이 너를 가장 필요로 하는 시간에 너는 어디에 있었니? 신이 물었다. 그러는 당신은 어디 있었냐고 윤은 되물었다. 윤의 물음에 수십 건의 악플이 달렸다. 윤은 일부러 건희를 혼자 뒀다. 아이에게 잘해주면 죽은 아이를 배신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건희를 방치했고 오랫동안 사탕은 엄마의 사랑 대신이었다.

“내가 안 죽어서 다행이에요?”

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은 다행이었다. 그걸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만약 둘 중에 누구를 선택할 수 있다면 나를 선택할 거예요?”

가장 나쁜 것과 가장 나쁜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지독한 밸런스 게임 같았다. 게임의 공식은 둘 중 어느 것도 쉽게 고를 수 없도록 밸런스를 적절하게 맞추는 것이었다. 윤은 균형을 잃은 것처럼 잠시 어지러웠다. 윤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세게. 누군가 윤의 머리와 턱을 동시에 잡고 흔드는 것처럼. 그래야만 했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건희도, 윤 자신에게도 그것은 너무 이상하고 끔찍하지만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건희의 선생님으로부터 이제 전화는 오지 않았다. 일요일이면 남편은 다시 아이를 보러 왔다. 여자와는 잘 안 됐다고 시어머니는 아이를 생각해서 합치라고 부쩍 자주 전화를 했다. 윤은 남편이 돌아갈 때마다 그가 현관문에 등을 기댄 채 한동안 서 있다 간다는 것을 알았다. 쿵, 소리가 나고 발소리가 한참 후에 아주 느리게 다시 시작됐다. 다른 위로가 필요했던 거라고 윤은 생각했다. 남편도 자신도 그랬다고. 비가 오는 동안은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는 방법밖에 모르는 사람들 같았다. 언젠가 그칠 비를 종일 맞고 있는 사람. 하루하루가 지옥이에요, 알아요?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윤은 남편에게 그런 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걸 떠올렸다. 사랑받기와 사랑하기, 그것은 언제나 용기의 문제인 것처럼 이내 고개를 저었다.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자 거실 밖에서 쏟아져 들어온 물그림자가 암막 커튼처럼 종일 집안을 어른거렸다. 윤과 건희는 온전한 물의 세상에 갇혔다. 물의 깊이가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에 앉아 있는 것처럼 집은 깜깜했다. 수심 10m. 그것보다 깊은 물속은 거의 대부분의 빛이 투과되지 않는다고 했다. 비가 그치고 여름이 끝나면 봉투에 넣었던 돈을 꺼내 방충망을 새로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집은 한층 더 깜깜해졌다. 윤은 집이 점점 가라앉는 것 같았다. 20m…… 30m…… 눈을 감고 윤은 집이 물속으로 점점 더 깊이 내려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40m…… 비스듬히 기울어진 창과 문이 서서히 잠기고 끝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는 죽음 같은 순간…… 윤은 목이 말랐다. 마치 너무 많은 물속에서 몸이 균형을 잡으려는 것처럼.






● 당선소감

단단한 접착면을 가진 소설, 쓰고 쓰겠다

이소정 씨

몇 개의 문장이 있다. ‘소설은 태도다.’ 책상 앞에 포스트잇으로 붙여둔 것이다. 그 옆에는 ‘소설은 인물의 깊이를 더하는 방식이다.’ 가 있다. 너무 낡고 오래된 문장은 자주 떨어진다. 그런 날은 내 접착력을 의심한다. 당선 전화를 받던 날은 문장이 모조리 뜯긴 날이다. 마치 다시 붙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떨어졌다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의 자국을 오래 들여다볼 줄 아는, 단단한 접착면을 가진 소설을 쓰고 쓰겠다.

문학관에서 나는 오영수 선생님이 나를 소설에 살게 하는 것 같다. 엄창석 선생님, 당신은 내 마음속 가장 높은 산이다. 난계소설반 문우들과 영하, 송아, 모두 고맙다. 매일 쓰는 사람이게 해준 인호와 쉽게 붙이고 떨어질 마음이 아니라는 걸 알게 해준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1978년 울산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20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 심사평

소리 없이 소리 낼 줄 아는 기량 돋보여

구효서 씨(왼쪽)와 최윤 씨.

적지 않은 응모작이 리얼리티의 중력을 거스르려는 듯 서사에서의 인과와 개연 요소를 아랑곳 않고 명랑한 허구의 세계로 가뿐하게 날아오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본심에 오른 9편 중 반수 이상이 그러했는데 좀 더 주목을 받았던 건 능청스러움이 의외의 소설적 정황과 긴밀히 이어진 ‘주말부부’, 카프카와 카뮈가 작당하여 빚어놓은 듯한 호텔방에 인물을 슬쩍 가둔 ‘그들의 선량한 개와 한 사람’이었다.

‘대문충돌’은 한 인물의 탐구를 통해 인간 상호 간의 입장 차이와 충돌의 문제를 좀처럼 열리지 않는 문의 상징성에 능숙하고도 성실하게 대비시키며 무리 없는 완주를 해 당선작과 끝까지 겨뤘다. ‘밸런스 게임’은 어찌 할 수 없는 곤경과 난관의 사태를 불러와 독자 앞에 내놓는다. 미묘한 감정이나 심리의 완급을 조절하며 소리 없이 소리를 낼 줄 아는 작가의 기량이 앞으로 더 좋은 작품에 충분히 기여할 거라는 믿음을 주었다.

최윤·구효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