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 정책사회부 차장
국내 기업 10곳 중 4곳가량은 단체협약이나 취업규칙으로 아플 때 쓸 수 있는 병가(病暇) 규정을 두고 있다. 근로자 100∼299명 사업장은 약 65%, 300∼999명은 70%, 1000명 이상 사업장은 80% 정도가 그렇다. 유급병가를 둔 곳도 적지 않다. 그런데도 직장인들은 아파도 쉬기 어렵다고 한다.
사정이 이런 데는 병가가 법으로 규정돼 있지 않은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우리나라 근로기준법엔 유급이든 무급이든 병가 규정이 없다. 병가는 법의 보호를 받는 권리가 아니라는 얘기다. 공무원이라면 국가·지방공무원 복무규정에 따라 1년에 60일까지 유급병가를 쓸 수 있다. 근로자가 부모나 배우자, 자녀, 조부모, 장인, 장모 등 아프거나 다친 가족을 돌보기 위해 쉴 수 있는 권리는 있다. 남녀고용평등법에 그렇게 돼 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아플 때 쉴 권리가 법으로 보장돼 있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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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문재인 대통령이 “아프면 쉴 수 있는 상병수당의 시범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아프거나 다친 근로자가 소득 감소에 대한 걱정 없이 쉴 수 있게 사회안전망을 갖추겠다는 것이다. 이런 발표가 있자 재원 마련 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상병수당을 도입하면 적게는 연간 8000억 원, 많으면 1조7000억 원가량이 필요하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
재원 확보도 중요하다. 하지만 상병수당 도입을 위해 필요한 변화의 첫 번째로 ‘병가의 법적 권리 보장’을 꼽는 사회복지 전문가들이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아직 상병수당 제도가 없는 나라는 한국과 미국뿐인데 그래도 미국은 ‘가족 및 의료 휴가법’에 병가 규정이 있다. 상병수당 제도가 잘 굴러가려면 ‘아플 땐 쉬어도 된다’는 분위기가 사회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이종석 정책사회부 차장 w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