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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병, 새벽 택시 불빛 무시… 입수 장면도 찍혔지만 인지 못해

입력 | 2020-08-01 03:00:00

軍감시장비 10차례 포착해도 ‘깜깜’




탈북민 김모 씨(24)가 군 감시 장비에 10차례나 포착되고도 유유히 월북(越北)한 것으로 드러나자 군의 경계·감시 체계가 도미노처럼 무너졌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게다가 지난해 6월부터 ‘삼척항 노크 귀순’, ‘태안 보트 밀입국’ 등 1년여간 대형 경계 실패를 두 차례 겪고도 경계 시스템이 전혀 개선되지 않아 군 기강 해이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진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확산되고 있다.

김 씨가 지난달 18일 인천 강화군 연미정 인근에서 북한 개풍군 탄포 기슭에 도착할 때까지 군의 확인 및 보고 체계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작동한 게 없었다. 경계 근무를 제대로만 섰어도 김 씨의 월북을 저지하거나 최소한 인지라도 할 기회가 수차례 있었던 것이다.

김 씨가 택시에서 내린 이날 오전 2시 18분경 연미정에서 200m 떨어진 초소 근무자는 택시의 불빛을 포착했다. 이곳은 불과 10명 남짓한 주민이 살고 있어 새벽엔 인적이 매우 드문 곳이다. 그럼에도 근무자는 마을 주민일 것이라 여기고 추적, 감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김 씨가 강을 헤엄쳐 건너기 위해 배수로로 이동할 때까지 그의 행적은 초소와 위병소 폐쇄회로(CC)TV에도 3번이나 찍혔다.

이날 오전 2시 46분 배수로를 지나 한강으로 입수한 김 씨는 74분 동안 약 2km 거리를 헤엄쳐 오전 4시 북한 측 육지에 도착했다. 희미하지만 입수 과정, 물살보다 빠른 형체가 이동하는 모습도 근거리, 중거리 감시카메라에 5차례나 담겼다. 강에서 나와 북한 마을로 걸어가는 장면은 열상감시장비(TOD)에 두 차례 선명하게 포착됐다. 당시 근무자는 김 씨의 모습을 보고도 북한 주민이라 여겨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고 합동참모본부는 해명했다.

월북 루트로 이용된 배수로 내부엔 철근과 철조망으로 구성된 이중 장애물이 있었지만 모두 낡거나 틈이 벌어져 부실 관리된 것으로 드러났다. 군은 ‘보통 체구의 사람’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라 김 씨가 장애물을 건드리지 않고도 쉽게 빠져나간 것으로 봤다. 배수로를 매일 두 번씩 점검해야 한다는 지침은 지켜지지 않았고 군은 이중 장애물을 언제 설치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박한기 합참의장이 지난달 국회 국방위에서 “배수로를 하루 아침 저녁에 정밀 점검한다”고 밝혔지만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또 박 의장은 배수로에 마름모꼴 철근 장애물이 있다고 했지만 정작 수직 철근만 있었다. 이와 유사한 배수로가 김포∼강화∼교동도 일대에만 100여 곳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합참은 경계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당시 달빛이 밝지 않았고 밀물이 들어오는 때라 월북을 예상하기 쉽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감시 장비 추가 설치, 근무자 역량 강화 등 과거 경계 실패 뒤 내놨던 대책들을 ‘재탕’해 발표했다.

감시 장비에 포착되고도 근무자가 이를 인지하지 못한 사례는 수차례 반복돼 왔다. 게다가 연미정 인근에 설치된 또 다른 TOD는 지난달 23일 저장 용량 문제로 김 씨의 월북 때 영상이 모두 삭제돼 복구가 불가능했다. 올해 4월부터 6월까지 이어진 ‘태안 보트 밀입국’ 사건에서 드러난 문제와 유사하다.

사전에 특이 사항을 발견하지 못하면 감시 장비 자체의 효용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근본적인 문제점도 드러났다. 감시 반경이 수백 m에 불과한 근거리, 원거리 감시카메라 화면에서 수 km가량 떨어진 김 씨는 육안으로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의 하얀 점으로 나타났다.

군은 해병대 2사단장을 보직 해임하고 해병대사령관과 수도군단장에게 엄중 경고했지만 일각에선 지휘 책임을 지닌 군 수뇌부에 대한 문책 범위가 줄었다는 지적도 나왔다. 지난해 6월 ‘삼척항 노크 귀순’ 사건 때는 합참의장과 지상작전사령관 등도 경고를 받았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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