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리크스가 2011년 9월 미국 외교전문 25만여 건을 공개했을 때 특히 화제가 된 건 미 국무부가 여러 대사관 등에서 수집해 정리한 각국 지도자에 대한 평가였다. 김정일 당시 북한 국방위원장은 “무기력한 늙은이”, 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은 “리더십에 대해 지식인들이 한결같이 비관적으로 보는 인물”로 평가됐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겐 ‘테플론(프라이팬) 메르켈’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한국 대통령에 대해선 “김영삼은 다혈질에 지식이 제한적” “노무현은 고졸이나 신념이 확고” “이명박은 인간관계에 서툴러 최측근만 신뢰”라고 평했다.
▷당시 공개된 정보 중엔 친중 반미를 외쳐온 김정일의 속마음을 읽게 해주는 내용도 있었다. 김정일이 2009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에게 “중국을 믿지 않는다”고 했고 “미국이 싫어한다는 얘기를 듣고 아리랑 공연에서 미사일 발사 장면을 없앴다”고 말했다는 것. 이명박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원자바오 당시 중국 총리와의 회담 공개로 논란을 빚었다. “북한은 젊은 사람(김정은)이 권력을 잡았다. 50∼60년은 더 집권할 텐데”라고 걱정하자 원 총리가 “역사의 이치가 그리 되겠나”라고 답했다는 것. 이는 ‘북한 붕괴론’과 맥이 닿은 발언이어서 파장이 컸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회고록을 쓰기 위해 트럼프를 보좌하며 꼼꼼하게 기록했나 보다. 대통령 퇴임 전에 고위급 외교 참모가, 국가기밀 유출로 형사처벌의 위험을 감수하고 외교 비사(秘史)를 폭로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외교 기밀 폭로”라는 비판도 있지만, 유독 트럼프 대통령 시절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진다는 점에서 트럼프의 과대망상 리더십이 자초한 일이란 평가도 있다. 영국 역사학자의 말대로 그의 회고록은 외교관들에겐 ‘악몽’이지만 역사가에겐 ‘꿈’의 사료가 될 듯하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