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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곳곳 4·3사건 유적 산재… 시민이 최대 피해자였다

입력 | 2020-05-25 03:00:00

[인문학으로 본 한라산]〈1〉




한라산 백록담 북벽 정상에 제주4·3사건 당시 한라산 금족령을 해제한 뒤 개방을 기념하는 ‘한라산개방평화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한라산은 해발 1950m로 남한 최고봉일 뿐 아니라 ‘한라에서 백두까지’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한반도를 대표하는 산이다. 한라산의 가치를 확인하고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것이 1970년 3월 24일이다. 올해로 국립공원 지정 50주년을 맞은 한라산은 유네스코(UNESCO) 세계자연유산, 세계지질공원, 생물권보전지역 등의 핵심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국내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동안 한라산의 가치를 논할 때 지형·지질, 동식물, 오름(작은 화산체), 계곡 등 자연경관이 핵심이었다. 상대적으로 인문 분야에 대한 연구나 조사는 소홀했다. 한라산은 제주 사람들에게 생명과 생활의 원천이다. 의식주 재료를 제공했으며 다치고 힘든 심신을 달래주는 성소(聖所)이기도 했다. 한라산국립공원과 인접 지역을 중심으로 현장 답사, 증언 채록, 자료 조사 등을 통해 한라산에 담겨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리즈로 싣는다.》

17일 오전 일반인 출입금지 구역인 한라산 백록담 북벽 정상.

제주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비스듬히 기울어진 높이 95cm, 너비 45cm인 비석이 시선에 들어왔다. 한반도 모양을 한 비석 전면에는 ‘한라산개방평화기념비(漢拏山開放平和紀念碑)’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고 오른쪽 상단에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뒷면에는 ‘영원히 빛나리라. 제주도경찰국장 신상묵 씨는 4·3사건으로 8년간 봉쇄되었던 한라 보고를 갑오년 9월 21일 개방하였으니 오즉 영웅적 처사가 아니리요(후략)’라고 쓰여 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을 해제한 것을 기념해 당시 제주도경찰국장이 이듬해 백록담 북벽 정상에 비석을 세운 것이다. 이 비석은 한라산국립공원 지역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제주4·3사건(4·3사건) 유물 유적 가운데 하나다.

○ 4·3사건 당시 교전 흔적 남아

비석 외에 ‘평정기념비(平定紀念碑)’라는 글자가 새겨진 또 다른 비석이 1949년 7월 23일 백록담 서벽 정상에 세워졌다. 이 비석은 현재 흔적을 찾지 못하고 있다. 언제 사라졌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았지만 평정기념비를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을 확인한 결과 1958년까지 서벽 정상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비석에 새겨진 평정기념비 위에 1952년에는 ‘승리’라는 글자를 쓴 흔적도 확인했다. 1958년 이후 평정기념비의 행방은 알 길이 없다. 백록담 서벽 밑으로 밀어버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산악인 등이 수색했으나 여태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4·3사건 당시 토벌대와 무장대가 교전했던 제주시 아라동 관음사에는 토벌대 주둔소의 흔적이 남아 있다. 1949년 3월부터 잔여 무장대 토벌을 위한 2연대의 작전이 강화되면서 대대병력과 경찰 등이 주둔했던 곳이다. 관음사 주둔지 외에도 서귀포 수악교 인근에 1대대를, 교래리와 산굼부리 사이에 3대대를 배치해 방어선을 구축했다. 관음사 일대는 4·3사건 발발 당시부터 무장대의 주요 길목이었고 한때 무장대의 본거지가 되었던 어승생 진지와 가까운 작전상 중요 지역이었기 때문에 토벌대가 이곳에 주둔한 것으로 보인다.

○ 최대 격전지이자 피난처

한라산에서 기념비와 토벌대 주둔소를 제외하면 4·3사건을 시각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한라산은 최대의 격전지이자 피난처였다. 한라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 옆 어승생악은 일제강점기 진지동굴이 남아 있다. 진지동굴은 4·3사건 당시 무장대의 아지트였다. 일본군이 남기고 간 총검 등은 무장대의 무기가 됐다. 한라산에서 무장대 활동은 당시 토벌대 자료에 의존해 추적하거나 추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라산국립공원지역 물장오리와 테약장오름 사이 초지, 어승생악 주변 초지 등은 당시 무장대의 훈련 장소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라산의 잔존 무장대원 60여 명은 부모 형제들로부터 생필품을 보급 받아 연명하고 있다가 6·25전쟁 발발 1개월 뒤인 1950년 7월 25일 민가 99동을 불태웠다. 무장대들은 남하하는 북한군들이 제주도에 상륙할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지속적으로 습격을 하며 교전을 벌였다.

○ 낮에는 토벌대, 밤에는 무장대에 시달려

군경 토벌대와 무장대의 격전 속에 최대 피해자는 당시 주민들이었다. 1948년 11월부터 전개된 중산간(해발 200∼600m) 마을 초토화 작전은 주민 2만여 명을 한라산으로 내몬 결과를 초래했다. 낮에는 토벌대, 밤에는 무장대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한라산으로 피신해 숨어 지내야 했다. 토벌대에 발각될 때는 무장대로 오인을 받아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현임종 씨(86)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현 씨는 1948년 4·3사건이 발발한 그해 겨울 제주시 노형동 고향 주민들과 함께 눈 덮인 한라산 아흔아홉골, 작은드레, 큰드레, 장구목 등지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그는 “군인들의 수류탄을 피해 바위 밑에 밤새 숨죽이고 있다가 날이 밝자 절벽인 병풍바위 옆으로 돌아서 올라가 보니 이웃 주민들이 여러 명 죽어 있었고 아버지를 비롯한 몇 명만 주위를 헤매고 있었다”며 “죽은 사람들을 매장할 도구가 없어 부서진 쇳조각으로 땅을 파 가매장을 했다”고 증언했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4·3사건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했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가 2000년부터 올해 3월까지 4·3사건 관련 희생자와 유족을 접수해 심의한 결과 사망 1만422명, 행방불명 3631명, 후유장애 195명, 수형자 284명 등 1만4532명이 희생자로 인정을 받았다. 유족은 8만451명이다.

토벌대 주둔소 가운데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보존 상태가 양호한 수악주둔소는 2018년 6월 국가등록문화재 제716호로 등재돼 관음사주둔소와 더불어 4·3사건 유적 탐방지가 됐다. 무장대 총책이었던 이덕구가 은신했던 아지트(해발 640m)에는 당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깨진 무쇠솥, 사기그릇 등이 남아 있다. 이곳은 ‘이덕구 산전(山田)’으로 불리며 현재 관련 단체 등의 교육 및 탐방 코스로 활용되고 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