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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 기간의 절반에 달하는 9년 3개월(1969년 10월~1978년 12월) 동안 역대 최장수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내며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 기틀을 마련한 김정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장이 25일 별세했다. 향년 96세.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나 충남 강경상고, 일본 오이타(大分) 고등상업학교(현 오이아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고인은 해방 전 일제에 의해 강제 징집을 당했고 일본 히로시마에서 일본 패망을 맞았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당시 심각한 화상을 입기도 했다.
육군 준위로 6·25 전쟁에 참전했던 고인은 1956년 한국은행을 거쳐 1959년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이재국장으로 공직에 발을 디뎠다. 1964년 11월 30일, 한국 수출이 사상 최초로 1억 달러를 돌파했을 때 이 사실을 가장 먼저 박 전 대통령에게 전화로 알린 것도 당시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이었던 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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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박정희 정부의 수출입국, 공업화 정책 수립에 깊숙이 관여했고 한국 경제 성장의 발판이 된 중화학 공업 대책과 방위산업 육성 정책의 계획과 실행을 주도했다. 새마을 운동, 경부고속도로 건설, 부가가치세 도입,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건설 등도 모두 고인의 손을 거쳤다.
‘박정희 경제사령관의 총참모장’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고인은 정작 박 전 대통령과는 학연·지연 등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박 전 대통령 시절 경제수석과 농림부(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지낸 정소영 씨는 “고인은 진짜 무(無)에서 시작해 성실성과 능력으로 박 전 대통령의 눈에 들었다”고 말했다. 고인은 박 전 대통령의 경제 리더십의 핵심으로 ‘인사’를 꼽았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지명하는 국방·내무·법무·무임소장관(특임장관)을 제외한 나머지 장관은 비서실장에게 복수로 추천하도록 했다”며 “차관 이하 인사는 장관에게 일임했다”고 말했다.
1979년 1월 비서실장 근무를 마친 뒤 주일대사로 임명된 고인은 1980년 9월 귀국 후에는 공직을 맡지 않았다. 대신 1983년부터 박 전 대통령 시절과 관련한 회고록 집필에 몰두해 ‘한국경제정책 30년사’, ‘아, 박정희’,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등을 썼다. 집필 과정에서 시력을 심각하게 잃었음에도 고인은 생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취미를 “회고록 쓰는 것”이라고 했다. 생전 고인이 일했던 서울 마포구의 사무실에 있는 장식물은 박 전 대통령의 사진이 유일했다. 한국 경제 발전사와 정치 변화를 다룬 역작으로 평가 받은 고인의 저작들은 영어, 일어로도 번역됐다.
고인의 아버지는 7년 6개월 동안 조흥은행을 이끌었던 김교철 전 조흥은행장이고, 큰 형은 김정호 전 한일은행장이다. 김정호 전 행장의 딸은 미래통합당 김종인 전 선거대책위원장의 부인인 김미경 이화여대 명예교수다. 김종인 전 위원장은 고인의 조카 사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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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으로는 희경·두경(전 은행연합회 상무이사)·승경(전 새마을금고연합회 신용공제 대표이사)·준경(전 한국개발원 원장) 씨와 사위 김종웅(전 현대증권 회장)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삼성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8일 오전 8시 30분. 02-3410-6923.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