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AP 뉴시스
연주회가 끝날 무렵 특이한 퍼포먼스가 있었다. 레너드 번스타인이 작곡한 ‘캉디드’의 서곡을 연주하기 전 지휘자 마젤은 마이크를 잡고 “뉴욕 필의 옛 지휘자 번스타인은 아직도 우리 단원들의 마음에 살아 있으며, 오늘도 여기 지휘대에 올라 뉴욕 필을 지휘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젤은 ‘번스타인의 유령’에게 ‘부탁합니다’라는 말을 한국어로 외치고 무대 왼쪽으로 비켜났다. 20세기가 낳은 세계적 작곡가인 번스타인은 무려 32년 동안이나 뉴욕 필하모닉을 이끈 지휘자이기도 했다. 이날은 그가 타계한 지 15년이 넘은 때였지만, 번스타인의 유령은 평양에서도 뉴욕 필을 능수능란하게 지휘해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퍼포먼스의 의미를 알게 됐다. 살아있는 마젤이 죽은 번스타인에게 지휘를 부탁한 것은 2008년에도 김일성이 통치하는 북한에 대한 은유였을 것이다. 김정일은 이른바 ‘유훈 통치’를 내세워 아버지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독재를 폈다. 그렇게 ‘김일성의 유령’은 2008년에도 여전히 북한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클래식에도 조예가 깊었던 김정일은 분명 풍자의 의미를 알아채고 쓴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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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적인 측면에서 김정은은 새로운 길을 가는 듯 보였다. 김일성·김정일과 달리 개인사업 단속을 중단하는 등 친시장적 정책들을 펴면서, 집권 초반부터 ‘경제 살릴 것’을 지시했다. 국내 언론들은 스위스에서 유학한 그가 중국식 개혁·개방을 시작할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작년 4월 개정한 헌법에는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를 실시한다는 조항이 포함됐다. 생산목표를 채운 초과 생산 부분은 기업이 자율적으로 생산·판매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반면 할아버지 김일성이 밀던, 집단주의 정신의 ‘대안의 사업체계’는 삭제됐다. 김정은은 정말 중국 개혁개방의 아버지 덩샤오핑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핵개발에 따른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로 인한 위기상황에서 김일성의 유령이 다시 북한 정치에 소환되고 있다. 노동당은 지난해 말 전원회의에서 위기상황의 정면돌파를 강조하면서 시장에 대한 통제를 다시 강화했다. 힘든 시기에 내부 단합과 정신력을 강조하는 이른바 ‘돌파 멘탈리티’를 사용하는 것이다. 코로나19 위기에 대해서도 국제사회의 방역 협력 제의를 못 들은 체 하고, ‘북한과의 보건분야 협력을 바란다’던 문재인 대통령의 제안도 뿌리쳤다. 인민을 의식해서 대외적으로 줄곧 자존심을 세우던 김일성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면서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대북제재 해제를 촉구하는 서한을 유엔에 보냈다.
김정은은 경제의 작동방식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시장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보다는, 국가권력을 이용해 거대한 공장을 만드는 사회주의적인 발전방식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독재정권의 제1목표는 수성(守成)이기 때문에, 행보가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는 지금까지 지속된 ‘안전한’ 정책을 펴려는 욕망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
하지만 혁신 없는 독재자들이 타이밍을 놓칠 경우 상황이 심각해진다.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면 권력은 한순간 뒤집힌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를 참고할 만하다. 주민들의 분노를 폭발시킨 것은 그의 무리한 산업화 정책이었다. 통제체제 하에서 경제를 개발하기 위해 루마니아는 외채를 쓸 수밖에 없었고, 이는 다시 주민들의 부담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만들어진 산업단지들은 비효율성이 누적되어 1970년대부터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주민들의 희생은 보상받을 수 없게 됐다. 결국 1989년 일어난 루마니아 혁명으로 차우셰스쿠는 비참한 말로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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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에 대해서도 과연 북한 정권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지 냉정하게 자문해보아야 한다. 유럽 국가들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의 보건의료서비스는 고난의 행군 시절 국영상업망의 붕괴와 함께 무력화된 지 오래이다. 방역체계가 너무도 미흡한 북한에서 코로나19가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 이미 북한 내 확진자가 나왔다고 보고 있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사실이라면, 마치 미분방정식의 해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확산세가 심화되는 단계만 남아 있다. 지원 거부는 단기적으로 위신을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정권의 안위 자체를 위협할 것이다.
김정은은 전통적인 지지층에 의존하려다 정권의 위기를 겪은 선대의 경험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김정일은 2009년 화폐개혁을 통해 시장을 뿌리뽑으려 했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김병로 교수에 따르면 이전의 제한적인 개혁 개방 조치에 따라 시장화가 진행되자 상인계급이 힘을 얻게 되었고, 이를 바라보는 기득권 계층이 큰 불만감을 가지게 된 것이 그 배경이었다. 그러나 화폐개혁은 시장에 참여하는 주민들의 반발로 완전히 실패했다. 전통적 지지층을 지키기 위해 김일성의 유령을 소환했지만 결국 시장을 이기지 못했다. 오히려 시장의 힘이 재확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출신성분에 따른 계층체제는 혼란의 와중에 있으며, 주민들은 점차 이 시스템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대신 시장 활동을 중심으로 다시 계층이 분화되고 있다. 북한 주민의 절대다수가 시장에 의존하고 있고, 장사를 한 경험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신흥자본가 계급이 형성되고 있다. 화폐개혁에 대한 저항과 정권의 굴복에서 알 수 있듯이, 시장을 지지하는 주민들은 이미 상당수이다. 이 집단은 정책을 뒤집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됐고, 따라서 집토끼인 핵심군중보다도 정치적 힘이 더 강해졌다고 볼 여지도 있다. 전통적 계층질서에 호소해서 정권을 유지하는 것은 앞으로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김정은의 계산은 틀렸다. 위기 때마다 소환되는 김일성의 설자리는 갈수록 더 좁아질 것이다.
손세호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16학번(서울대한반도문제연구회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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