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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당에 경제를 못 맡기게 하는 장면들[오늘과 내일/고기정]

입력 | 2019-12-23 03:00:00

부동산-주52시간-내년 예산서 뭘 보여줬나
강령의 가치도 외면, 견제 능력이라도 있나




고기정 경제부장

한때 ‘경제는 보수’라고들 했다. 한국의 보수 세력이 시대가 원하는 민주적 가치를 따라가지 못했던 측면이 있지만 국가 경제를 운영하는 능력에서는 상대적 우위에 있다는 인식에서다. 그 근저에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보편적 동의가 깔려 있다. 자유한국당이 아직까지 제1야당인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한국당이 그런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정당인지 의문스럽다.

지난주 12·16부동산대책이 나온 직후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과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다주택 고위 공직자에게 집을 한 채만 남기고 다 팔라고 했다. 한국당은 처음엔 ‘보여주기식 쇼’라며 비아냥대더니 나중에는 장차관들이 수도권 아파트는 안 팔고 세종시 아파트만 팔려 한다고 비난했다.

나는 이 지점에서 한국당이 이미 보수의 궤도에서 이탈한 채 정치적 조건반사만 반복하고 있음을 재확인해 줬다고 본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최우선시한다. 장차관들이 집을 사든지 팔든지 그건 국가와 사회가 보호해 줘야 할 그들의 선택이자 자유다. 노영민 실장과 홍남기 부총리의 지시 또는 권고는 이를 근본부터 부정하는 것이다. 공직자의 사유재산권 제한은 심지어 국가공무원법에도 없다. 제61조에 청렴의 의무가 있긴 하지만 향응 등 뇌물 수수 관련 규정일 뿐이다.

제대로 된 보수정당이라면 도리어 장차관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옹호해 줬어야 했다. 그럼으로써 정부의 이번 부동산대책이 우리 공동체가 동의하고 있는 근본 가치에 과연 부합하는지, 주택시장 안정과 서민 주거권 보장이라는 정책 목표를 달성하려면 이번 대책을 어떻게 수정·보완할지 치열하게 논의했어야 한다. 지금의 제1야당은 이 정도 의제 설정도 못 한다.

한국당의 궤도 이탈은 황교안 대표의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이달 초 황 대표는 서울대 특강에서 주52시간 근무제를 비판하며 “발전을 계속하려면 우리가 조금 더 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52시간제가 문제인 건 개인과 기업의 근로권을 일률적으로 제한해서다. 그래서 탄력근로제 확대 등 다양한 예외 규정 도입이 시급하다. 황 대표도 이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을 더 해야 한다”고 한 건 자유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전근대적 권위주의나 국가주의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주52시간제에 대한 문제의식의 출발점이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는 한국의 보수가 수구로 각인되게 하는데도 또 한 번 일조했다. 한국당 일반의 인식 수준이 아직까지 이 정도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고도로 다원화돼 있는 한국 경제를 맡기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나마 보수의 핵심 가치인 공동체 의식도 희박하다. 국회 예결위원장을 맡은 한국당 김재원 의원은 여당과 다른 야당들이 날치기로 내년 국가 예산을 처리했다고 비판하는 와중에도 자기 지역구 예산은 100억 원을 더 챙겼다. 나라살림을 맡겨 본들 똑같은 식일 것 같다.

한국당의 강령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칙의 헌법 가치에 기반하여’로 시작한다.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 강령의 첫 문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항일정신과 … 민주이념을 계승한다’로 돼 있다. 두 정당이 추구하는 가치와 지향은 이처럼 명확히 구분된다. 그래서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당은 강령에만 가치를 넣어놓고 실제로는 무슨 가치를 기반으로 정치활동을 하는지 모호하다. 민주당 집권 이후 경제 성적표에 ‘역대 최악’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게 다반사임에도 한국당을 대안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게 이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