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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여전한 변론권 침해[현장에서/고도예]

입력 | 2019-12-10 03:00:00


고도예 사회부 기자

올해 6월 14일 A 변호사(42)는 사무실 팩스로 공문 한 통을 받았다. 경찰이 보낸 것인데 ‘의뢰인 B 씨의 경찰 조사에 더 이상 참여하지 말라’는 통보였다. ‘피의자 대신 답변했고 조사가 너무 길다는 등 모욕적인 발언을 했다. 껌을 씹으면서 조사실에 들어와 불만을 토로했다.’ 변호인의 조사 참여를 제한하는 이유를 경찰은 이렇게 적었다.

공문을 받기 하루 전날 A 변호사는 B 씨에 대한 경찰 조사에 참여했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농지에 폐기물을 불법 매립한 혐의로 B 씨를 수사하고 있었다. 경찰관은 B 씨가 운영하던 폐기물 업체의 경영 구조를 물었다. A 변호사는 피의자 대신 답했다. 그러자 경찰관은 구두 경고를 했다. 몇 시간 뒤 A 변호사는 조사실을 떠났다가 껌을 씹으며 다시 돌아왔다. 이때도 담당 경찰관이 지적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경찰관은 A 변호사에게 공문을 보낸 것이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이런 이유로 변호사를 조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 건 변론권을 부당하게 침해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현행법과 규칙을 보면 경찰관은 변호인이 신문을 방해하거나 수사 기밀을 유출하는 등 수사에 현저히 지장을 줬을 때에만 변호인 입회를 금지할 수 있다. A 변호사는 수사를 방해하지 않았는데도 경찰관이 마음대로 조사 참여를 제한했다는 게 변협의 판단이다. 변협은 3일 경찰청에 관련자를 징계해 달라고 요청했다.

경찰청은 지난해 3월 “인권 경찰로 거듭나겠다”며 변호인의 조사 참여와 메모, 피의자에 대한 조언을 보장하는 ‘변호인 참여 실질화’ 방안을 내놨다. 하지만 이런 방안을 내놓은 지 1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경찰관들에게 변론권을 침해당했다는 변호사들의 얘기가 이어지고 있다.

C 변호사는 지난해 12월 서울 서초경찰서에서 수백억 원대 사기 혐의로 구속된 피의자를 변호하면서 조사 내용을 기록했다. 그러다가 경찰관한테서 “메모하지 말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D 변호사는 지난해 초 경기 고양시 일산서부경찰서에서 경찰관에게 강압적인 발언을 들었다며 인천지방변호사회에 진정서를 냈다. 경찰관이 조사를 시작하면서 변호인에게 “피의자 대신 대답하면 안 된다. 알았다고 대답하라”며 세 차례나 다그쳤다는 것이다.

“사건과는 관계없는 변호인의 개인적 자질 때문에 입회를 제한했습니다.” A 변호사의 조사 참여를 제한했던 경찰관은 본보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런 해명에는 변호인의 조사 참여를 경찰관이 마음대로 제한할 수 있다는 사고가 담겨 있다. 수사기관의 조사 과정에 변호인 참여를 제한하는 건 헌법에 보장된 피의자의 방어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경찰청은 일선 경찰관들이 변론권과 방어권의 의미부터 다시 새기도록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인권 경찰’은 헛구호에 그칠 뿐이다.
 
고도예 사회부 기자 ye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