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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택왕후는 누구야?…‘무왕-선화공주’ 러브스토리 진실은 [김상운 기자의 발굴왕]

입력 | 2019-12-05 14:44:00




●선화공주는 실존 인물일까?


미륵사지 서쪽 석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 금판 위에 붉은색 글씨로 쓰인 명문은 백제사에 대한 해석을 바꿔놓았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2009년 미륵사지 서쪽 서탑 해체보수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 여기 새겨진 명문은 백제사에 대한 해석을 바꿔놓았습니다. 특히 ‘우리 백제 왕후는 좌평(佐平·백제 귀족) 사택적덕의 딸로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는 내용은 백제 최대 사찰인 미륵사의 건립 연도와 발원 주체를 처음 확인시켜줬습니다. 그동안 고건축 전문가들은 왕흥사 창건기록(600년)을 근거로 미륵사 창건시기를 그와 인접한 600년대 초로 봤지만 실제는 이보다 약간 늦은 시기였던 겁니다.

명문은 백제 무왕의 배필로 알려진 선화공주가 과연 실존 인물인가라는 의문도 제기했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소년 시절 ‘마를 캐는 아이(薯童·서동)’로 어렵게 지낸 무왕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선화공주)이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서라벌로 향합니다. 선화에 반한 서동은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이겠다고 결심하고 꾀를 쓰죠. ‘선화공주는 남몰래 밤마다 서동을 만난다’는 가사의 ‘서동요(薯童謠)’를 아이들이 부르도록 한 것. 소문을 듣고 딸을 오해한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귀양 보냈고, 궁 밖에서 기다리던 서동은 그녀를 유혹했습니다. 신부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서동은 훗날 백제 30대 무왕(?~641)이 됩니다.

익산 미륵사지 전경. 문화재청 제공



학계 일각에서는 명문을 근거로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삼국유사 기록은 잘못이며, 선화공주는 설화 속 가공의 인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그러나 선화공주 실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미륵사가 ‘3탑 3금당’의 독특한 구조를 가진 사찰이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현재 흔적만 남아 있는 중앙 목탑 터에 선화공주의 사리봉영기가 따로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이와 관련해 조선시대와 달리 주자성리학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대사회에서는 왕이 정비(正妃)를 여러 명 거느렸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백제사 연구자인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는 “고려 태조 왕건은 정비만 6명을 뒀다. 선화공주와 사택왕후 모두 무왕의 정비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역사학계에서 반론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사리봉영기는 함께 발견된 유물의 편년을 명확히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미가 큽니다. 김낙중 전북대 교수(고고학)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보고서’에서 “조성 연도가 확인된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장엄구는 다른 백제 유물의 연대를 추정하거나 변천 과정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보존 처리 과정에서 익산 쌍릉 소왕묘에서 출토됐다는 사실을 밝혀낸 ‘금동 밑동쇠’(위쪽 사진). 이 밑동쇠의 가운데 구멍(화살표)에 쏙 들어가는 ‘금동 널꾸미개’(가운데)는 이 중 ①번 하나뿐으로 소왕묘에서 출토됐음을 알 수 있다. 윗부분의 금동장식을 서로 비교해보면 ①번이 대왕묘에서 나온 ②번에 비해 문양이 더 입체적이고 세련돼 고고학적으로 볼 때 만들어진 시기가 앞선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쪽 사진은 복원한 밑동쇠와 널꾸미개를 결합해 목관에 고정시킨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익산 쌍릉서 발견된 실마리

이와 관련해 선화공주가 실존했으며 무왕과 나란히 익산 쌍릉(雙陵)에 묻혀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물이 발견됐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2015년 국립중앙박물관은 출처가 알려지지 않은 금동 유물을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이것이 익산 쌍릉의 하나인 소왕묘(왕비가 묻힌,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왕릉)에서 출토된 ‘금동 밑동쇠’(金銅製座金具·목관 뚜껑과 측판에 붙는 널꾸미개를 고정시켜 주는 장신구)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일제강점기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과 당시 작성된 유물 목록을 확인한 결과였습니다.

이병호 현 국립중앙박물관 전시과장은 이 밑동쇠와 딱 들어맞는 소왕묘 출토 ‘금동 널꾸미개’(金銅製棺裝飾·목관의 뚜껑과 측판을 연결해주는 장신구)를 찾아냈으며, 이것이 무왕이 묻힌 대왕묘의 널꾸미개에 비해 문양과 제작기법에서 시기적으로 더 앞선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왕비가 묻힌 소왕묘가 무왕의 대왕묘보다 먼저 만들어졌다는 뜻이죠.


금동사리호(가운데)와 사리봉영기(금판), 구슬 등 사리장엄구 유물들. 국립문화재연구소



이는 무왕과 함께 쌍릉에 묻힌 왕비가 미륵사지 사리봉안기에 나오는 사택(沙宅)왕후가 아님을 방증합니다. 왕후가 왕보다 나중에 죽었는데 묘가 먼저 만들어질 순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사택왕후는 무왕보다 1년 뒤인 서기 642년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 과장은 “쌍릉 소왕묘는 사택왕후의 것은 아닌 게 분명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소왕묘의 주인은 누구일까. 이 학예관은 ‘백제 사비기 익산 개발시기와 그 배경’ 논문에서 소왕묘에서 나온 금동 밑동쇠가 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인근의 백제 왕릉인 부여 능산리 고분군은 부부묘 형태입니다. 고려사 지리지와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도 익산 쌍릉에 묻힌 인물이 무왕과 왕후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과장은 “7세기 전반에 죽은 인물로 무왕의 또 다른 왕비였던 선화공주가 묻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현재까지 관련 문헌이나 유물에 적시된 무왕의 왕비는 선화공주와 사택왕후 이외에는 없습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