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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곡진 역사의 고비마다, 신앙은 위안과 희망의 버팀목

입력 | 2019-10-04 03:00:00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동유럽 순례]<상> 믿음의 나라 폴란드
全인구의 97.6%가 가톨릭 신자… 聖 요한 바오로 2세는 국민적 영웅
검은 성모-소금광산-아우슈비츠 등 한 서린 아픔의 상처 곳곳에
폴란드에서 천주교가 갖는 의미는 따뜻한 밥 한끼-일상의 공기 같은 것




국민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인 폴란드는 방방곡곡에 가톨릭 문화유산이 빼곡하다. 1 성 요한 바오로 2세 생가 박물관 전시품. 교황은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로 스키를 꼽았다. 2 쳉스토호바의 검은 성모는 이 땅이 자랑하는 신앙의 구심점이다. 3 야스나구라 성 바오로 은수자회 수도원, 4 비엘리치카 소금광산, 5 아우슈비츠수용소, 6 수용소에 전시된 어린 희생자 의복. 바도비체·쳉스토호바·비엘리치카·오시비엥침=정양환 기자 ray@donga.com·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제공

《‘시간이 흘러가도, 영원(eternity)은 존재한다.’ 지난달 22일 오전(현지 시간). 폴란드 바도비체는 꽤나 쌀쌀했다. 광장엔 패딩 차림도 눈에 띄었다. 그래서일까. 성(聖)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 생가로 스며든 햇볕은 유난히 따스했다. 그 유혹에 굴복해 다가선 2층 창가. 골목 너머 성모마리아대성전(basilica) 벽엔 해시계와 위 글귀가 새겨져 있다. 어쩌면 어린 카롤(교황의 속명)은 진작부터 그 불멸의 계시에 이끌린 게 아닐까.》
 
○ “나는 행복합니다. 당신들도 행복하십시오.”

바웬사 전 대통령, 로만 폴란스키 감독, 축구선수 레반도프스키…. 폴란드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많다. 한데 순례길에서 만난 ‘원톱’은, 2014년 시성(諡聖)된 요한 바오로 2세였다. 성당이나 박물관, 수도원은 당연지사. 소금광산이나 아우슈비츠수용소에도 흔적이 빼곡하다. 살짝 과식한 기분까지 들었다.

물론 굴곡진 이 땅의 역사를 마주하면 웬만큼 수긍이 간다. 몽골 침략, 종교전쟁, 제2차 세계대전. 주변 강대국에 휘둘리고 공산체제에 억눌렸던 아픔. 신앙은 버팀목이자 지렛대였다. 현재도 인구의 97.6%가 가톨릭신자일 정도니. 변곡점마다 고국을 찾아 “우리는 다르지 않다”고 설파한 교황은 그들에게 위안과 희망의 화신이었다.

쳉스토호바에 있는 야스나구라 성 바오로 은수자회 수도원의 성화 ‘검은 성모(Black Madonna)’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쭙잖은 잣대로, 제작 시기도 불분명한(5∼8세기 추정) 가로세로 81.3×121.8cm의 이 작은 그림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스토리가 더해지며 아우라가 폭발한다. 목발을 짚고 들어왔다 치유를 맛봤다는 기적의 데자뷔는 접어두자. 체코 신학자 얀 후스(1369∼1415) 추종자들이 흠집 냈단 마리아의 오른뺨 칼자국이 백미다. 수도회 소속인 시몬 수사는 “여러 전문가가 시도했지만 지워지질 않았다”고 했다. 용서하되 잊지 말아야 할 민족에게 이만큼 구심점이 될 아이콘이 또 있겠나. 지금도 이 단아한 수도원을 해마다 500만여 명이 찾는 이유다.

다시 ‘상처’를 떠올려본다. 교황 생가 박물관엔 1981년 바티칸에서 저격당했을 당시 권총이 전시돼 있다. 굳이 왜. 그는 병상에서 일어선 뒤 터키 저격범을 찾아가 용서를 베풀고 선처를 호소했다. 2005년 선종 때 남긴 한마디.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십시오.” 몸소 자비를 실천한 지행합일(知行合一) 앞에 고개를 조아릴 뿐이다.

○ 아픔을 함께 버텨낸 이웃이자 눈물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21세기에 모든 국민이 하나의 종교라니. 교황이나 성화가 훌륭한 구심점이라 해도, 이런 단일대오는 범상치 않다. 어쨌든 ‘선택’은 결국 기층민중의 손에 달렸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비엘리치카에서 만난 소금광산은 의미심장했다. 197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뽑힌 이곳은 지하로 327m까지 파고 내려간 대형 광산. 13세기부터 채굴을 시작했는데, 약 200km에 이르는 통로를 따라 2000여 개의 방이 있단다.

흥미로운 건 곳곳에 세워진 성당이다. 17세기 ‘성 안토니오 성당’ 등 아름다운 경전이 어두컴컴한 지하로 빛을 인도한다. 뭣보다 101m 깊이에 있는 ‘성녀 킹가 성당’은 눈이 동그래졌다. 가로세로 54×17m에 높이가 약 11m. 이걸 광부들이 일일이 파내고 다듬었다니. 어떤 예술작품보다 아름답지만, 그들의 피땀 눈물 역시 암염에 깊이 배어 있다.

발걸음마다 가슴이 뻐근해졌던 오시비엥침(독일어 아우슈비츠) 수용소도 마찬가지다. 후대에 심은 가로수 가득한 마당은, 멀리서 보면 한 폭의 그림이다. 한데 섬뜩한 전기철조망을 피해 건물에 들어서면 냉기가 뒷목을 파고든다. 특히 어린 희생자의 꼬까옷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여행가는 줄 알았던 부모는 아마 아이에게 가장 예쁜 옷을 꺼내 입혔으리라.

이 나라 백성들이 신앙을 저버릴 수 없던 까닭이 여기 있지 않을까. 높다란 첨탑도, 끝 모를 땅굴도, 그리고 가스실도…. 어디 하나 서글픈 넋의 흔적이 지워지질 않았기에. 그리고 그 절망의 고통 곁엔, 동료 수감자를 대신해 죽은 콜베 신부(1894∼1941) 같은 존재가 있었기에. 폴란드에서 천주교는 높이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권능이 아니었다. “따뜻한 밥 한 끼”(시에파크 수녀)처럼 일상을 함께 숨 쉬는 공기였다.

바도비체·쳉스토호바·비엘리치카·오시비엥침=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