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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 키우기… 아랍의 경제위기 돌파 신성장동력

입력 | 2019-08-22 03:00:00

[글로벌 현장을 가다]
이집트, 카이로에 허브 조성… UAE 카타르 사우디도 육성 나서
청년실업-탈석유화 극복할 대안… 창업 생태계 조성까진 갈 길 멀어




‘북아프리카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이집트의 창업단지 그릭캠퍼스에서 젊은이들이 창업가들의 발표를 듣고 있다. 이집트뿐 아니라 많은 아랍 국가들이 최근 창업과 스타트업 육성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그릭캠퍼스 제공

이세형 카이로 특파원

19일 오후 2시(현지 시간)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아메리칸대학(AUC) 구(舊) 캠퍼스. 한국의 광화문광장에 해당하는 타흐리르 광장에서 불과 약 300m 떨어진 곳이다. 아랍권 최고 명문대로 꼽히는 AUC는 2008년 카이로 외곽의 신(新) 캠퍼스로 옮겨 갔지만 이곳은 여전히 이집트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의 장소로 꼽힌다. 2013년부터 ‘이집트의 실리콘밸리’로 꼽히는 스타트업 허브 그릭캠퍼스(GrEEK Campus)가 둥지를 틀면서부터다.

오가는 사람들의 복장부터 달라 보였다. 여성 대부분이 히잡을 쓰지 않았고 남성도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이었다. 나이도 대부분 20, 30대로 보였다. 이들은 나무와 조형물이 잘 어우러진 커다란 정원, 곳곳에 마련된 탁자와 의자 주변에서 활발하게 대화를 나눴다. 흙먼지가 풀풀 휘날리는 카이로의 일반적 모습과는 달랐다. 마치 서구 대도시에 와 있는 듯했다.

○ 북아프리카 최대 스타트업 허브

그릭캠퍼스는 유명 창업가 겸 벤처투자자 아흐메드 엘 알피가 조성한 창업 단지다. AUC 이전으로 생긴 빈 건물 5개(2만5000m²)에 스타트업, 벤처투자사, 세계 유명 기업 지사 등을 유치했다. 실리콘밸리처럼 창업가들끼리 협력해 ‘창업 생태계’를 조성하자는 취지다. 설립 후 6년이 흐른 지금은 이집트를 넘어 북아프리카 최대 스타트업 허브로 통한다.

그릭캠퍼스란 이름을 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그리스식을 뜻하는 영어 단어 ‘그릭(Greek)’에서 ‘r’를 빼면 ‘괴짜(Geek·창업자들의 독특한 성향)’가 된다. 이들은 로고의 영문명을 ‘괴짜’로 강조하기 위한 ‘GrEEK’으로 쓴다. 과거 이곳엔 카이로 거주 그리스인들의 학교가 있었다. 지식 탐구와 토론을 강조하는 그리스 문화가 창업 생태계 활성화에 꼭 필요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이집트인들은 서구 문명의 뿌리인 그리스 문화 형성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을 때에도 그 핵심은 현 이집트 2대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이집트를 약 300년간 통치하며 클레오파트라 여왕 등을 배출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도 그리스계다.

이집트의 인구는 약 1억 명. 유럽과 아라비아반도를 잇는 지정학적 요충지에 있다. 작은 스타트업으로 출발하더라도 사업이 유망하면 엄청난 고정 시장을 확보할 수 있다. 미래의 ‘마크 저커버그’(페이스북 창업자)를 꿈꾸는 이집트 젊은이들이 이곳으로 몰려드는 이유다. 카이로대 졸업생이라는 무스타파 씨(28)는 기자에게 “창업을 꿈꾸거나 첨단 기술에 관심 있는 이집트 대학생치고 그릭캠퍼스를 찾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 IT 및 SW 스타트업 주목

현재 그릭캠퍼스 안에는 140여 개 스타트업이 있다. 대부분 정보기술(IT) 및 소프트웨어 업체다. 교육 소프트웨어 스타트업 ‘나프함’의 모스타파 파라하트 공동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언제든 옆방에 있는 다른 스타트업의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해당 회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문화가 있다. 서로의 기술 및 시장 정보도 적극 공유한다”고 설명했다.

나프함은 이집트, 튀니지, 시리아, 아랍에미리트(UAE),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에서 약 500만 명의 가입자를 확보했다. 중동에서 가장 주목받는 교육 소프트웨어 업체로 미국의 세계적 벤처 투자사 ‘500스타트업’, 일본 카메라회사 캐논, 인도네시아 투자자들과도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상업용 건물의 출입 체계 앱을 개발한 ‘패스앱’, 온라인 쇼핑용 검색 엔진 ‘야우타’ 등도 그릭캠퍼스를 대표하는 스타트업이다.

미 승차공유업체 ‘우버’, 사이버보안업체 ‘트렌드마이크로’, 물류업체 ‘아라맥스’ 같은 유명 기업들의 이집트 사무소도 이곳에 있다. 이들 세계적 대기업이 주도하는 강연과 회의도 자주 열린다. 특히 창업가, 투자자, 예비 창업가들의 교류를 위한 행사가 큰 인기다. 그릭캠퍼스 측은 향후 인공지능(AI), 로봇, 바이오 분야의 스타트업을 적극 유치할 계획이다.

벤처투자사 ‘체인지 메이커’의 자말 카이야트 파트너는 “많은 스타트업이 시장 조사, 법률 및 규제 대응, 마케팅 등을 위해 많은 돈을 들여 해외로 다녀온다. 이집트는 내수 시장이 크기 때문에 그릭캠퍼스 스타트업들은 이런 노력과 비용 없이도 안정적 성장기를 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

○ 청년 실업과 경제 위기가 창업 열기 자극

그릭캠퍼스 전경

이집트에는 창업을 꿈꾸는 20, 30대가 유독 많다. 지난해 세계은행 기준 청년 실업률이 약 32.6%에 달할 정도다. 최근 정부는 비대한 공공부문 구조조정을 위해 공무원 및 공기업 직원 채용을 계속 줄이고 있다.

중동 산유국과 달리 석유와 천연가스도 거의 생산되지 않아 세계 에너지 대기업들의 진출도 활발하지 않다. 찬란한 고대 유적과 홍해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무기로 한때 국가 주요 산업이던 관광업도 예전 같지 않다. 특히 2011년 민주화 운동 ‘아랍의 봄’, 2013년 군부 독재 반대 시위로 정국이 불안해진 후 관광업이 더 위축됐다.

경제가 어렵다 보니 20, 30대 대부분이 한 번쯤 창업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회계학을 전공했지만 스타트업에 관심이 많다고 밝힌 오마르 씨(28)는 “나를 포함한 많은 젊은이들이 정부와 기존 기업에 기대하지 않고 스스로 일자리를 만드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여긴다. 다만 스타트업 활동을 체계적으로 지원해주는 제도와 교육이 부족하다”고 아쉬워했다.

아직은 그릭캠퍼스 내 스타트업 중 해외 유명 주식시장에서 대규모 기업공개(IPO)에 성공하거나 높은 돈을 받고 유명 투자자에게 매각된 사례는 없다. 낡은 인프라, 관료주의, 약한 금융산업이 이집트가 창업 중심지로 도약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만큼, 이런 장벽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 오일달러로 스타트업 키운다

아랍권의 스타트업 열기는 이집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인근 UAE, 카타르, 사우디 등은 막대한 석유와 천연가스로 얻은 ‘오일 머니’로 국가 주도의 스타트업 활성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세 나라 모두 최고지도자가 탈(脫)석유 및 산업구조 다각화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두바이와 아부다비라는 국제도시를 보유한 UAE는 걸프만의 스타트업 허브로 자리매김했다. UAE는 지난해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내놓은 국가경쟁력지수의 ‘벤처캐피털’ 부문에서 세계 5위에 올랐다. ‘중동의 우버’ 카림, ‘중동의 아마존’ 수크닷컴 등이 모두 UAE가 자랑하는 스타트업이다. 우버는 3월 카림을 31억 달러에 사들였다. 아마존은 2017년 6억 달러에 수크닷컴을 인수했다.

카타르는 수도 도하의 국제교육 특구 ‘에듀케이션시티’에 2004년 미 명문 공대 카네기멜런대(컴퓨터과학, 정보시스템, 경영학 등), 2003년 미 텍사스A&M대(기계공학, 전자·컴퓨터공학, 화학공학, 석유공학 등) 등을 유치했다. 2009년 8억 달러를 투자해 연구개발 및 창업 기관인 ‘카타르 과학기술 파크(QSTP)’도 조성했다. 최근 세계 유명 언론 및 문화 콘텐츠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미디어시티’도 조성하고 있다. 카타르 공보부 관계자는 “미디어시티에서 게임 및 영상 스타트업을 집중 육성하겠다”고 말했다.

사우디도 최고권력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앞장서서 스타트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특히 IT와 신재생 에너지 산업에 관심이 많다. 자신이 직접 기획한 국가발전계획 ‘비전 2030’에서도 창업을 강조한다. 또 사우디국부펀드(PIF)는 우버 등 유명 스타트업에 투자한 경험도 있다.

이권형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창업 생태계를 조성해본 경험과 노하우는 부족하지만 아랍권 전체적으로 창업 열기가 뜨겁다. 정보기술과 인재 자본이 뛰어난 한국 기업 및 스타트업과의 협력 여지가 풍부하다”고 진단했다.
 
이세형 카이로 특파원 turt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