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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바다가 된 미사일 공장[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입력 | 2019-08-08 03:00:00


지난달 31일 단거리 발사체 발사 장면을 지켜보며 웃고 있는 김정은. 뉴시스

주성하 기자

김정은은 최근 보름 동안 동·서해를 오가며 4차례나 미사일과 방사포 시험 발사를 주관했다. 그는 2010년 11월 연평도를 포격한 북한군의 방사포탄이 명중률도 한심하고 불발탄도 많자 충격을 받고 담당자들을 닦달했다. 그 결과물이 최근 시험한 신형 조종 방사포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북한의 유도 시스템은 미국의 민용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사시 미국이 GPS 코드를 바꾸면 포탄 조종은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김정은이 미사일과 방사포 사격에 매달릴 것이란 징후는 올해 초부터 예상됐다. 4월 시정연설에서 “티끌만 한 양보나 타협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김정은은 5월 4일과 9일 잇따라 미사일과 방사포 사격을 참관했다. 그리고 5월 말 강계뜨락또르(트랙터)종합공장 등 자강도 강계 일대 군수공장들을 방문했다.

‘26호 공장’으로 불리는 강계뜨락또르종합공장은 북한군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포탄과 폭탄, 미사일 탄두, 기뢰, 어뢰 등을 제조하는 군수공장이다. 이번에 시험한 조종 방사포탄도 이곳에서 생산됐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이곳은 미사일과 방사포탄 등을 이란 시리아 등 중동 국가들에 팔면서 외화벌이에도 크게 기여했다. 1949년 2월 강계 남천동에 공장이 생긴 이래 김일성은 30차례, 김정일은 23차례, 김정은은 2차례 방문했다. 북한에서 이 정도로 김씨 일가의 총애를 받은 공장은 찾기 어렵다.

남쪽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공장에는 끔찍한 비극의 역사가 있다. 북한이 포사격을 할 때마다 남쪽 사람들은 가깝게는 2010년의 연평도를, 멀리는 1994년의 ‘서울 불바다’ 발언을 떠올린다. 그런데 그 불바다가 현실화된 곳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기 위해 미사일과 포탄을 제작하던 26호 공장이었다. 며칠 전 취재를 위해 통화한 강계 출신 탈북민이 대뜸 “1991년 11월 30일 사고 말이죠”라고 되물었을 정도로 현지 사람들에겐 기억이 선명한 일이다.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그날 밤 잠에 들었던 강계 사람들은 엄청난 폭발음과 유리창이 부서지는 소리에 일제히 눈을 떴다. 폭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밤새 이어졌다. 미사일과 포탄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땅으로 떨어졌다. 전쟁이 발발해 폭격을 받는 것으로 착각한 주민들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집을 뛰쳐나와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당시 100km 떨어진 곳에서도 벌겋게 물든 강계의 하늘이 보였다.

이날 사고는 수출용 미사일과 포탄, 폭탄 수천 발이 쌓여 있었던 26호 공장 야적장에 불이 나면서 시작됐다. 추위에 떨던 경비병들이 피운 불이 포탄 상자에 옮겨 붙은 게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공식적인 원인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26호 공장은 외부 공격을 피하기 위해 산 아래를 깊숙이 파고, 여러 층에 걸쳐 고가의 독일제 기계로 구성된 생산라인을 갖추고 있었다. 엄청난 양의 화약도 쌓여 있었다. 공장이 시가지와 붙어 있기 때문에 만약 지하 시설에까지 불이 붙으면 도시 전체가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화재 진압을 위해 먼저 뛰어들었던 사람들이 폭발로 죽자, 2차로 보안원(경찰)으로 구성된 결사대가 투입됐다. 불바다를 뚫고 들어간 이들은 몸으로 불길을 막아가며 공장 입구를 폐쇄했다. 그 결과 공장을 지켜 북한 군수산업의 핵심이 무너지는 것은 막았다. 하지만 잇따른 폭발로 갱도 내 산소가 타버리고 입구까지 밀폐되자 지하에서 일하던 야간작업조 300여 명 전원이 질식해 죽었다. 나중에 폐쇄했던 문을 열었을 때 여성들을 가운데 두고 남성들이 둘러싼 시신들이 한곳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군율이 적용되는 곳인지라 죽는 순간까지 질서를 흩뜨리지 않은 것이다.

이날 사고로 외부 사망자도 1000명 넘는다는 말도 나돌지만 북한이 정확한 실상을 밝히지 않고 있어 알 수는 없다. 북한의 역대급 폭발 참사가 아이러니하게도 최대 군수공장에서 일어났고, 군수공업의 도시 강계가 가장 생생한 불바다를 끔찍하게 경험한 도시가 됐다는 사실 앞에서 “불을 즐기는 자 불에 타죽는다”는 속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쏘고, 터지는 것만 보면 환하게 웃는 김정은에게 한 번쯤 상기시켜 주고 싶은 말이자 기억이기도 하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