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내 괴롭힘 금지법’ 교육 비상
최근 금융계 A기업 블라인드에는 16일을 기다린다는 글이 속속 올라왔다. 한 작성자는 특정 상사를 지적하며 “그간 느꼈던 설움을 더 이상 참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적었다. 다른 기업 게시판에는 상사로부터 ‘갑질’을 당했을 때 어떻게 신고해야 하는지 방법을 묻는 이들이 많았다. 16일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되는 첫날이다.
4일 산업계에 따르면 주요 기업 인사팀과 법무팀 등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조항을 담은 취업규칙을 만들고 교육에 나서느라 비상이 걸렸다. 어떤 행동이 직장 내 괴롭힘이고, 어길 경우 어떤 징계를 담을 수 있을지 노조와 합의해 16일 이전에 취업규칙을 만들지 않으면 과태료 500만 원을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이미 취업규칙 변경 절차를 끝냈고 지난달 전사 교육을 실시했다. 현대자동차도 준법지원팀에서 전 직원에게 ‘꼭 알아야 할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란 내용의 e메일을 보내는 등 준비에 나섰다. 현대차 관계자는 “노조와 협의해 취업규칙 문구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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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질문화 근절 환영 vs 정의 애매해”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지난해 간호사 ‘태움’ 사태,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의 사내 폭력사태 등으로 직장 갑질 근절에 대한 여론이 거세지자 올 초 근로기준법에 관련 조항을 넣은 것이다.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금지한다는 조항이다.
이 법으로 가해자를 직접 처벌할 수는 없지만 회사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경우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다. 회사의 관리 책임을 강화하는 것이다. 만약 회사가 피해자나 신고자에게 해고 등 불리한 처우를 한다면 대표이사는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받을 수 있다. 기업들이 앞다퉈 직장 내 괴롭힘 방지 교육에 나서는 이유다.
SK텔레콤 관계자는 “하반기 전사 교육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항공은 임원을 포함한 관리자를 대상으로 한 교육을 따로 진행하고 자체 온라인 인사포털시스템 내에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할 수 있는 ‘접수처’를 만들 계획이다.
기업들은 ‘일단 무조건 조심하자’며 눈치를 살피고 있다. 법 시행 초기인 만큼 팀장급들은 ‘첫 타자’가 돼서는 안 된다며 몸을 사리고 있다. 사원 대리급 직원들은 신고 방법을 공유하는 중이다. 한 대리급 직원은 “만일을 대비해 일단 녹음을 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부당한 처우를 받았을 때 이야기를 들어주는 경로가 생겼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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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기업 팀장은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괴롭힘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면서 “상사 입장에선 교육 차원에서 훈계한 것인데 괴롭힘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 “인사팀 걸핏하면 조사할까”
일부 기업 인사팀은 벌써부터 블라인드나 회사 익명 게시판 등에 특정 간부 사원의 ‘갑질’이 오르면 강력 대응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B기업은 얼마 전 블라인드에 한 팀장에 대한 불만의 글이 올랐고, 댓글이 수십 개 달리자 인사팀이 직접 해당 팀장에 대한 조사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불만 내용은 주로 “자기가 잘나간다고 자랑하고, 일을 남에게 미룬다”는 것이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자랑하면 듣기야 싫겠지만 괴롭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팀장급 이상 임직원들은 인사팀이 조사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대기업보다 사내 ‘갑질’ 피해가 큰 중소기업에는 개선 효과가 정작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교육 인력이나 인프라가 열악한 중소기업들은 법 시행이 코앞이지만 자체적으로 대비하기 쉽지 않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회사에 법 시행 관련 안내문을 뿌리긴 했지만 아직 취업규칙을 개정할 계획조차 못 잡고 있다”고 말했다.
김현수 kimhs@donga.com·강승현·김호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