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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청희의 젠틀맨 드라이버]우아하고 섹시한 ‘커니시’ 럭셔리 컨버터블의 진수

입력 | 2019-05-24 03:00:00


경매에 나온 프랭크 시내트라의 커니시 컨버터블. Silverstone Auctions 제공

화려한 색을 뽐내는 꽃과 산뜻한 녹색의 물결을 이루는 나무. 자연은 봄마다 화려한 풍경으로 눈을 즐겁게 하며 한적한 곳으로의 드라이브를 부추긴다. 햇볕은 따사롭고 바람은 선선한 봄은 온몸을 하늘에 내맡기며 달릴 수 있는 컨버터블을 즐기기에 좋은 계절. 어쩌다 한 번 찾아오는 좋은 날, 컨버터블의 지붕을 열고 달린다면 일상 속 스트레스는 시원하게 날아갈 것이다.

아쉽게도 요즘 우리의 봄길 드라이브는 황사, 꽃가루, 미세먼지가 종종 훼방을 놓는다. 현실에서 매일 오픈 드라이빙을 즐기기는 어려운 셈이다. 그럴 때에는 남부 프랑스 지중해 연안처럼 경치도, 공기도 좋은 휴양지로 컨버터블과 함께 떠나는 여행을 마음 속에 그려보는 것도 즐겁다. 고풍스러운 럭셔리 컨버터블을 몰고 칸 영화제의 레드카펫을 만나러 코트다쥐르를 달리는 배우가 된 듯한 상상 말이다.

그런 상상의 그림을 완성할 한 대의 컨버터블을 꼽자면 어떤 것이 있을까? 사람마다 취향은 다양하겠지만 아마도 롤스로이스 커니시만큼 잘 어울리는 차는 드물 것이다. 1971년에 나온 커니시는 1995년까지 무려 24년이나 만들어진 장수 모델로, 20세기 롤스로이스 컨버터블을 대표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름은 익숙하지 않더라도 지금 중년을 넘긴 사람들이 사진을 보면 전형적인 롤스로이스의 얼굴과 차체에 금세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우아함과 섹시함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모습과 롤스로이스 특유의 고급스러움에 반한 당대 셀러브리티들이 가장 갖고 싶어 했던 차이기도 하다.


커니시는 무엇보다 이름부터 드라이브 동반자로서의 자질을 타고난 차다. 커니시(corniche)는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에 뿌리를 둔 단어로, 해안 절벽을 끼고 난 구불구불한 길을 뜻한다. 지중해 연안의 멋진 길에서 즐기는 드라이브에 어울리는 차로서의 운명이 주어진 셈이다.

커니시라는 이름은 1971년부터 쓰이기 시작했지만, 사실 차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나왔을 때의 이름은 실버 섀도(Silver Shadow) 픽스트 헤드 쿠페와 드롭헤드 쿠페였다. 픽스트 헤드 쿠페와 드롭헤드 쿠페는 각각 지붕이 고정된 쿠페와 지붕을 접어내릴 수 있는 쿠페라는 뜻으로, 차체 형태를 구분하는 일반적 표현으로 바꾸면 쿠페와 컨버터블에 해당한다. 즉 실버 섀도라는 이름의 모델을 바탕으로 만든 쿠페와 컨버터블임을 알 수 있다.


기본 모델이 4도어 세단이었던 실버 섀도는 롤스로이스 역사에서 큰 전환점이 된 모델이다. 이전까지 모든 롤스로이스는 사다리꼴 프레임 위에 차체를 따로 얹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실버 섀도는 처음으로 별도의 프레임 없이 강판을 용접해 만든 차체가 뼈대 역할도 함께 하는 현대적 설계를 도입했다. 이와 같은 섀시 일체형 차체 구조는 이른바 모노코크(monocoque)라고 하는 것으로, 20세기 중반 이후 거의 대부분의 승용차에 쓰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즉 실버 섀도는 롤스로이스의 설계가 현대화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모델이다.

실버 섀도 세단을 바탕으로 2도어 4인승 구조로 만든 것이 실버 섀도 픽스트 헤드 쿠페와 드롭헤드 쿠페였다. 길고 복잡한 이름이 주는 부담을 덜고, 기본 모델인 4도어 세단과 다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1971년에 두 모델은 커니시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쿠페는 커니시, 컨버터블은 커니시 컨버터블이라는 이름으로 단순화된 것이다.

두 모델은 당대 가장 호화로운 쿠페와 컨버터블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 특히 아름다운 외모와 화려한 이미지 덕분에 쿠페보다 컨버터블의 인기가 더 높았다. 그래서 커니시라고 하면 대개 컨버터블 모델을 가리킨다. 실버 섀도 세단과 마찬가지로, 커니시 쿠페와 컨버터블 역시 모노코크 구조를 쓴 첫 현대적 롤스로이스 쿠페와 컨버터블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커니시의 바탕이 된 실버 섀도는 롤스로이스의 최상위 모델인 팬텀보다 조금 크기가 작은 ‘대중적’ 성격의 모델이었다. 그러나 대중적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롤스로이스 기준으로 그렇다는 것일 뿐, 호화로움과 품격에서는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5m가 넘는 길이, 1.5m에 육박하는 높이는 지금 팔리고 있는 초대형 세단들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다. 거리가 3m가 넘는 앞뒤 바퀴 사이 공간을 채우는 좌석은 네개 뿐이었다. 차에 타고 내릴 때는 물론 실내에 앉았을 때에도 불편함을 느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정평이 난 롤스로이스의 조용하고 부드러운 주행감각은 커니시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여러 롤스로이스 차에 두루 쓰인 전통의 V8 6.75L 엔진은 2.25t이 넘는 무게의 차체를 가볍게 움직이기에 충분한 힘을 냈다. 빠른 가속과 최고 속도는 롤스로이스에게는 큰 의미가 없지만, 시속 200km 가까운 속도를 어렵지 않게 낼 수 있었다.

커니시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세련되고 우아한 디자인의 차체다. 실버 섀도 세단이 격식을 갖춘 정장처럼 조금 긴장된 느낌을 준다면, 커니시는 옆에서 보았을 때 도어 뒤쪽에 더한 고전적인 곡선과 부드럽게 아래로 흐르는 차체 뒷면이 턱시도와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통적으로 롤스로이스의 차체를 주문제작한 코치빌더 멀리너 파크 워드(Mulliner Park Ward)의 세련된 해석과 차체제작 능력이 만들어 낸 예술적 터치다.

호화로운 컨버터블의 진수는 지붕을 접었을 때 완성된다. 실내에 있는 버튼을 눌러 두터운 직물 재질의 소프트톱을 열면 드러나는 실내는 코널리 가죽과 원목 질감이 살아있는 장식에서 장인정신을 느낄 수 있다. 버튼이 달린 소프트톱 덮개를 씌우고 나면 매끈한 곡면의 차체에 앞 유리만 솟아올라 호화로운 요트를 연상케 한다.

롤스로이스가 커니시의 마지막 주문을 받은 것은 1995년이었다. 실버 섀도 시절을 포함해 30년 남짓 만들어진 커니시는 6000대가 조금 넘고, 그 가운데 5146대를 차지할 만큼 컨버터블의 인기는 절대적이었다.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 프랭크 시내트라, 데이비드 보위, 엘턴 존 등 당대 인기 가수들은 물론 가수 레이디 가가, 방송인 제임스 메이 등 요즘 인기 있는 여러 유명인도 한때 소유했을 만큼 세대를 뛰어넘는 사랑을 받았다.

2000년부터 2년 남짓 완전히 다른 신세대 설계의 컨버터블을 통해 잠시 이름이 다시 쓰인 것을 마지막으로, 커니시라는 이름은 롤스로이스 라인업에서 사라졌다. 그대신 고스트 세단을 바탕으로 만든 던(Dawn)을 통해 그 개념이 이어지고 있다. 커니시에서는 21세기의 롤스로이스에 어울리는 현대적 감각으로 만들어진 톤과는 다른 20세기 특유의 멋과 낭만을 느낄 수 있다.

지금도 해외에서는 잘 관리된 커니시 컨버터블이 클래식카 매매 및 경매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직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거리를 빛내는 커니시도 많다. 이 봄, 누군가에게는 오리지널 커니시를 몰고 니스 해변의 멋진 풍경 속을 달리는 것이 상상이 아니라 현실일지도 모른다.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