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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문권모]‘거리의 변호사’가 많아져야

입력 | 2019-05-11 03:00:00

법률서비스 넘치는 미드 속 미국처럼 ‘삼류 변호사’라도 가깝게 있었으면




문권모 채널A 콘텐츠편성전략팀장

#1 중년의 고교 화학교사 월터 화이트는 어느 날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수술이 불가능한 폐암이란다. 죽을 날짜를 받아 놓고 보니 인생이 허망하다. 아내는 늦둥이를 임신 중이고 고교생 아들은 뇌성마비로 몸이 불편하다. 고심 끝에 그는 결심한다. 자신의 전공을 살려 한방 크게 터뜨리기로. 낡은 캠핑카를 사서 사막으로 향한 월터가 만들어낸 것은 바로 마약이었다.

#2 사울 굿맨은 ‘모든 악당들이 찾는’ 속물 변호사다. 그는 월터를 위해 돈세탁이나 증거 인멸 같은 일을 처리해준다. 사실 그에게는 사연이 많다. 자잘한 사기 행각으로 연명하던 그는 변호사인 형의 도움으로 감옥에 갈 위기를 벗어난다. 이후 형이 세운 법률회사에서 사환으로 일하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의 실제 사례를 보여준다. 통신 과정으로 미국령 사모아대에서 법학 학위를 딴 뒤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사울 굿맨이 주인공인 ‘베터 콜 사울(Better Call Saul)’은 월터 화이트가 주인공인 ‘브레이킹 배드(Breaking Bad)’의 스핀오프다. ‘브레이킹 배드’는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남우주연상(브라이언 크랜스턴) 4번을 비롯해 드라마 최우수작품상, 남우조연상, 여우조연상 등 프라임타임 에미상을 12번이나 받았다. 그중 가장 매력 있는 조연 캐릭터 사울 굿맨의 이야기가 별도의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현재 5번째 시즌이 방영을 앞두고 있다.

‘베터 콜 사울’은 월터를 만나기 전 사울의 이야기를 다룬다. 통신 과정으로 법학대학을 졸업한 변호사의 직업적 행로는 밝지 않다. 돈이 없어 미용실 창고를 사무실로 쓰고, 당장 멈춰도 이상하지 않은 고물차를 몰고 다닌다. 의뢰인을 찾아 끊임없이 발품을 팔지만, 어쩌다 들어온 괜찮은 사건은 큰 로펌이 채간다.

사울은 양심과 이기심, 준법과 불법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타락해간다. ‘베터 콜 사울’은 ‘브레이킹 배드’에 비해 범죄에 대한 묘사, 특히 잔인한 장면이 적다. 하지만 아기자기한 스토리텔링이 일품이다. 모든 범죄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세련되게 풀어낸다.

그런데 내게는 ‘소송 천국’이라 불리는 미국의 법률 서비스 현장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웠다. 예전에 미국에는 변호사가 많아 어떤 이들은 별별 잡다한 사건을 수임해 호구지책으로 삼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드라마를 보며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오랜만에 두 드라마를 떠올리게 된 것은 일종의 우연 때문이었다. 우선 최근 버닝썬 사태로 마약이 이슈가 되다 보니 ‘브레이킹 배드’ 생각을 하게 됐다. 여기에다 로스쿨 재학생들의 로펌 인턴 생활을 다룬 프로그램이 채널A에서 방영 중이다 보니 자연스레 ‘베터 콜 사울’의 스토리라인을 다시 더듬게 됐다.

얼마 전 올해 우리나라 변호사 시험 합격률이 간신히 50%를 넘겼다는 뉴스를 봤다. 지난해에는 합격률이 50% 아래로 내려가 큰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변호사 1인당 인구 수는 2000명 가량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서구 선진국의 변호사 1인당 인구 수는 독일 494명, 영국 436명, 미국 248명 수준으로 우리와 차이가 꽤 크다. 법조계 일각에선 나라별로 사정이 다르다며 우리나라 법조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란 말을 한다. 하지만 나와 주변 사람들의 경험에 비춰 보면 아직까진 일반 서민들이 변호사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미국 사람들은 급하면 사울 굿맨 같은 비용이 적게드는 변호사와 전화 상담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를 가나 ‘사울에게 전화하세요(Better Call Saul)’ 같은 변호사 광고가 넘쳐난다. 두 드라마를 떠올리며 다시금 생각해 본다. 삼류라도 좋으니 억울한 일이 생겼을 때 도움을 청할 변호사가 조금 더 많아질 순 없을까.

문권모 채널A 콘텐츠편성전략팀장 mikem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