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논설실장
색안경, 빨갱이 등등 수십 년전 횡행했던 단어들이 요즘 대통령 입에서 자주 나온다. 대통령의 시계가 아직 군부독재 시절에 유예돼 있는 게 아닌가하는 우려와 별개로, 민족의 명운이 걸린 북핵 문제에 발목을 잡거나 색안경을 끼고 봐서는 안된다는 호소에는 백번 공감한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북핵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집단의 대표 주자가 바로 청와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김정은은 이를 거부했다. 이행 시한표와 일정까지 규정하며 한번에 다 내놓으라는 로드맵이었다면 설령 김정은이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이해된다. 하지만 미국이 요구한 건 당장 모든 걸 내놓으라는 게 아니라 미래에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가야할 게 김정은은 지금까지 한 번도 기 보유 핵탄두·물질을 포기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더이상 핵무기를 만들지도, 시험하지도 않으며, 사용하지도, 전파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핵무기 4불(不)’은 강조하지만 이미 갖고 있는 걸 폐기하겠다는 언급은 일절 없었다.
그러면서 북한은 항상 ‘조선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동북아에서 미국의 핵우산, 핵 전략자산 전개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어서 훗날 북-미간에 핵군축 협상을 통해 논의해야 할, 얼마나 세월이 걸릴지 모를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그럼에도 하노이 담판 결렬 후 한국 정부의 대응은 현실을 무시하는 듯하다. 문 대통령의 열망대로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재개 및 제재 완화로 영변 폐기를 얻어낸다고 해도 그 다음 단계, 즉 핵탄두의 폐기는 어떻게 강제할 수 있을지, 대통령의 전략이 궁금하다.
만약 핵탄두·물질은 먼 훗날 미완의 과제로 접어두고 핵동결-제재 해제, 평화협정 등으로 평화와 남북경협을 정착시키는 게 문재인 정부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솔직히 그렇게 얘기하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 청와대가 객관적 상황을 외면한 채 남북 관계로만 내달리는 데 대한 우려와 비판은 색안경을 썼기 때문도, ‘과거를 잊지 못해’(4일 국가안보회의 총리 발언) 불안한 마음에서 발목을 잡으려 해서도 아니다.
비핵화 노력이 한 발씩 완성을 향해 가는 벽돌 쌓기, 되돌릴 수 없는 진전이 되기 위해 지금 해야 할 일은 철근 콘크리트 기초공사, 즉 김정은으로 하여금 핵탄두·물질까지 포함한 완전한 비핵화를 결심케 하는 것이다. 그것 없이는 사상누각이다. 비핵화가 목표라면서도 실제론 다른 걸 더 우선시하는 듯한 대통령의 행보가 안타깝다. 색안경을 벗어야 할 사람은 바로 문 대통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