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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식의 뫔길]무종교의 시대

입력 | 2018-12-20 03:00:00


국적과 신앙에 관계없이 열려 있는 프랑스 테제공동체 순례자들. 동아일보DB

김갑식 문화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미국 사회학자인 필 저커먼의 ‘종교 없는 삶’은 근래 종교 분야에서 화제가 됐던 책이다. 한마디로 신(神) 또는 종교 없이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오랫동안 종교와 사회의 관계를 연구해온 그는 한발 더 나아가 무종교인들이 더 도덕적이고 관대할 수 있다고 본다. 미국에서는 지난 25년간 무종교인이 두 배로 늘었다. 종교 지도자들의 부정부패, 여성의 사회 진출 증가,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발달 등이 무종교화의 원인이라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국내는 어떤가. 통계청이 2015년 기준으로 발표한 조사에서 무종교인은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는 56.1%에 이른다. 저커먼의 주장을 그대로 우리 사회에 대입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종교인에 대한 부정적 시선은 무종교화의 큰 원인이다. 2010년부터 5년간 전문직군별 강간 및 강제추행범죄 건수에 대한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종교인이 442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름도 알 수 없는 교단까지 포함돼 있다지만, 누구보다 앞장서 법을 지켜야 할 종교인의 비중이 높다.

종교 지도자들이 모인 종단 내부의 갈등과 이로 인한 사회적 파문은 올해도 여전했다. 불교계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여름은 뜨거웠다. 외부에 의해 부처의 법이 유린되는 법난(法難)이 아니라 ‘큰스님’들의 행태를 둘러싼 이른바 ‘승난(僧難)’ 때문이었다.

설정 총무원장의 은처자(隱妻子·숨겨놓은 처와 자식) 의혹은 종단을 뿌리부터 흔들었다. 1994년 종단 개혁을 이끌었던 원로 설조 스님이 원장 퇴진과 종단 개혁을 주장하며 41일간 단식을 벌였다. 국회 격인 중앙종회의 총무원장에 대한 초유의 불신임안 가결과 설정 원장의 사퇴가 이어졌다. 총본산인 조계사 안팎에서 종단수호대회와 종단의 전면적 개혁을 요구하는 승려대회가 동시에 열리는 부끄러운 장면도 연출됐다. 세 후보의 사퇴로 단독 입후보한 원행 스님이 9월 제36대 총무원장으로 당선됐지만 조계종에 대한 개혁 요구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요즘 총무원에서 보직을 맡은 스님들이 없을 때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 있다. ‘강남 총무원’이다. 총무원장 퇴임 뒤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자승 전 원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은정불교문화진흥원이 그곳에 있다. 설정 스님 옹립과 퇴진, 원행 스님의 선출 이면에는 자승 전 원장이 8년간 재임하면서 쌓은 인적, 물적인 힘이 그대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그래서 종권(宗權) 교체를 승난의 끝으로 보는 이는 많지 않다. 출가자의 계율 파괴를 둘러싼 논란이 여전한 데다 종권이 소수에게 집중돼 있는 구조적 문제도 개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예장 통합은 물론 세계 최대의 장로교회로 불리는 명성교회 사태로 떠들썩했다. 김삼환 목사가 퇴임한 뒤 아들 김하나 목사가 청빙됐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게 교회 측의 주장이다. 통합 재판국은 이를 교단법에서 적법하다고 판단했지만 9월 총회는 세습 방지를 천명한 교단법 정신에 위배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종교계는 미투 열풍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태석 신부(1962∼2010)가 선교 활동을 했던 남수단에서 2011년 발생한 천주교 수원교구 소속 신부의 여신자 성폭행 시도 사건이 불거졌다. 최근 인천 한 교회 목회자의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 신자 여러 명에 대한 그루밍(가해자에 의한 성적 길들이기) 혐의에 대한 수사도 진행 중이다.

오랜 인연이 있는 50대 영화감독인 A와 종교에 관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애주가에 골초인 그가 20대부터 꾸준히 교회에 다녔다는 것은 의외였다. 여러 교회를 전전하던 그는 한동안 서울 서초구 사랑의교회를 다녔다. “메뚜기처럼 여러 교회를 옮겨 다녔는데 옥한흠 목사의 설교를 듣다 뭔가 울컥하는 걸 느꼈다. 그러다 우연히 일본 공항에서 마주친 노(老)목사의 에나멜이 벗겨지고 해진 구두를 보고 신자가 됐다.”

2010년 옥 목사 소천(별세) 뒤 A는 더 이상 감동을 느낄 수 없어 교회를 떠났다고 한다. 요즘에는 서울 송파구의 한 교회에 나간다. 교회 건물 없이 학교 강당을 빌려 예배를 보고, 헌금함을 돌리지 않아 마음이 편해서라는 것이 그 이유다.

무종교 시대가 된 가장 큰 원인은 종교인의 오만 때문일지도 모른다. 종교인이 어떤 모습으로 살든 내 교회, 우리 사찰에 오리라고 믿는 것은 착각이다. 종교가 아니라 종교인의 문제다.

거리낌 없는 무애(無碍) 도인이자 자신을 낮추는 하심(下心)의 삶 끝에 올해 5월 입적한 오현 스님의 임종게가 떠오른다. ‘천방지축(天方地軸) 기고만장(氣高萬丈)/허장성세(虛張聲勢)로 살다보니/온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억!’

김갑식 문화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