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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베트남 달군 ‘사커 파파’… “제 조국 대한민국도 사랑해달라”

입력 | 2018-12-17 03:00:00

[‘박항서 매직’ 신드롬]베트남, 스즈키컵 10년만에 우승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가운데)이 15일 베트남 하노이 미딘경기장에서 열린 말레이시아와의 2018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결승 2차전 뒤 시상식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다. 사진 출처 VN익스프레스

거리는 기쁨의 폭풍에 휩싸였다. 온몸에 국기를 두른 채 자동차와 오토바이에 올라 시끄러운 나팔과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도시를 휩쓸고 지나가는 ‘디 바오’(베트남 축구팬들의 길거리 폭풍 세리머니)가 베트남 전역을 휩쓴 15일 밤 한국인들은 경기장 근처를 쉽게 지나갈 수 없었다.

“요즘은 그냥 못 지나가요. 한국인들을 보면 베트남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 막 안아줍니다. 한국말로 ‘사랑해요 코리아’라고 합니다.” 베트남에서 10년째 거주 중인 소태완 씨(39)는 “요즘 베트남에서 ‘안녕하세요’ ‘사랑합니다’라는 한국말은 기본”이라고 했다. 모두가 박항서 감독(59) 덕분이라는 설명이었다.

박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대표팀이 말레이시아를 1-0으로 물리치고 ‘동남아시아의 월드컵’이라고 불리는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우승을 차지한 이날 관중은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 호찌민과 박 감독의 사진을 나란히 들고 응원전을 펼쳤다. 베트남 현지에서 경기를 보았던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표팀 골키퍼 김병지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보다 열기가 더 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당시 한국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에 대한 열기가 엄청났지만 그 열기가 1년 내내 지속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박 감독은 지난해 부임 이후 1년 내내 추앙받고 있다. 박 감독에 대한 존중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박 감독은 지난해 10월 부임한 후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 챔피언십 준우승, 2018 아시아경기 4강에 이어 이번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A매치(국가대표팀 간 경기) 16연속 무패(8승 8무)라는 세계 기록도 세웠다. 베트남 축구 사상 최초의 기록들이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베트남인들의 박 감독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신드롬을 넘어 열풍으로 확산됐다.

교민들은 최근 삼성전자와 케이팝으로 시작해 한국 화장품이 이끌어 온 베트남 한류의 최절정에 박 감독이 있다고들 한다. 베트남에서 TV를 틀면 박 감독을 모델로 한 소시지, 로컬 기업 광고 등이 쏟아진다. 소 씨는 “박 감독의 모든 것에 관심이 있다 보니 박 감독과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도 인기 있다”며 “이분도 가는 곳마다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고 전했다.

이날 경기장 안팎에는 뒤통수에 박 감독 얼굴을 새기거나 문신을 한 청소년들, 박 감독으로 분장한 사람들도 있었다. 베트남 국기인 금성홍기와 태극기는 물론이고 심지어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 분장을 한 팬까지 등장했다. 이 사연을 소개한 현지 교민은 “한국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남북 관계가 잘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했다.

베트남 자동차업체 타코그룹은 박 감독에게 10만 달러(약 1억1300만 원)의 우승 축하금을 수여했다. 박 감독은 “축하금을 베트남 축구 발전과 불우이웃을 위해 쓰겠다”며 기부를 약속했다.

박 감독에 대한 열풍은 베트남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이어졌다. 이날 경기의 시청률은 18.1%로 한국과 우루과이 대표팀 간 경기 시청률 12.8%(닐슨코리아)보다 높았다. 서울의 한 아파트촌에서는 베트남의 첫 골이 터지자 마치 한국 팀의 골이 터진 것처럼 환성이 터져 나왔다. 축구팬들은 베트남 현지 소식에 “박 감독이 외교관 100명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며 열광했다.

베트남에서의 박 감독 열풍에 대해 호찌민에 거주하는 교민 이용훈 씨(48)는 “프랑스 식민지, 미군과의 전쟁 등을 거친 베트남인들에게 박 감독은 베트남의 고된 근현대사 속에서 베트남 국민 전체에 기쁨을 준 최초의 외국인일 것이다. 단순히 축구인 그 이상이다”고 설명했다. 베트남인 부두이 뚱 씨(27)는 “박 감독은 우리의 영웅이다. 승리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국가적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선수들을 진정으로 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파파’(아버지)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한국에서의 박 감독 신드롬은 2002년에 대한 향수와 대리만족이 함께 작용했다는 시각이 많다. 국내 축구팬 박명진 씨(33)는 “박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을 보면 2002년 한일 월드컵의 향기가 난다. 외국인 지도자의 성공 신화와 거리 응원 등 전 국민이 열광에 빠진 모습 등이 그렇다”고 말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우리’라는 집단 정체감이 강한 한국 사회는 해외에서 활약하는 한국인을 보면 마치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심리적으로 동일화하고 만족감을 얻는 것과 같은 현상이 있다. 특히 지금과 같은 경제적 침체기에 박 감독의 성공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다”고 분석했다.

박 감독은 “이 승리는 베트남인 모두가 이뤄낸 것이다. 이 승리를 베트남 팬들에게 바친다”면서도 “제 조국 대한민국도 사랑해 주세요”라고 전했다. 베트남과 한국 모두에 뜨거운 호응을 일으킨 우승 소감이었다.

정윤철 trigger@donga.com·김재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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