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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분방한 협업이 만든 ‘과감한 유혹’… 시청자 욕망을 두드리다

입력 | 2018-10-23 03:00:00

[스마트시대 문화전쟁 글이 무기다]
<3> 할리우드 ‘황금손’ 제작자 배리 조슨의 드라마 캐릭터




‘섹스 앤드 더 시티’는 미국 뉴욕에 사는 캐리 브래드쇼(세라 제시카 파커 역·오른쪽)와 친구들의 이야기로, 대도시 여성들의 일과 사랑, 우정, 결혼에 대한 가치관을 보여준다. 뉴욕이라는 도시에 대한 욕망도 자극한다. HBO 홈페이지

“뉴욕이 가진 매혹적인 분위기, 반짝이는 불빛, 그 속에 야망을 가진 사람들. 이 분위기는 ‘섹스 앤드 더 시티’가 만든 캐릭터죠. ‘옷이 그 사람을 규정한다’고 생각한 의상 디자이너 퍼트리샤 필드가 참여해 그가 고른 옷이 네 주인공 각각의 캐릭터를 만들고 이것이 뉴욕 그 자체로 이어졌습니다.”

지난달 미국 캘리포니아주 베벌리힐스의 A+E(에이앤이) 네트워크 사옥에서 만난 미국의 거물 드라마 제작자 배리 조슨은 “섹스 앤드 더 시티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하나의 캐릭터로 역할을 했기 때문에 매력이 극대화됐다”고 말했다.

그는 곱슬머리에 한쪽 어깨에 백팩을 걸친 수수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화려하고 깐깐한 이미지일 거란 예상은 깨졌다. 문 뒤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헬로’ 하고 인사하는 첫인상은 괴짜 아인슈타인이었다. 조슨은 ‘섹스…’를 포함해 배우 김윤진이 출연한 ‘로스트’ 등 수많은 히트작을 제작했다. 2014년부터는 에이앤이 스튜디오 대표를 맡아 프로그램 제작과 운영을 총괄 지휘하고 있다. 히스토리 채널의 ‘루츠’ ‘식스’ ‘나이트폴: 신의 기사단’과 라이프타임의 ‘언리얼’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 자유분방한 협업이 만든 캐릭터, ‘뉴욕’

“모든 걸 가졌지만 사랑은 찾을 수 없었던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의 여성. 그게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었습니다.”

미국 유명 TV 프로듀서 출신의 배리 조슨 A+E 스튜디오 대표는 “좋은 스토리는 좋은 캐릭터에서 나온다. 거기가 바로 시작 지점”이라고 말했다. LA=조윤경 기자 yunique@donga.com

1998년 미국 케이블 채널 HBO에서 ‘섹스 앤드 더 시티’가 처음 전파를 탔을 때 언론의 반응은 냉담했고 섹스를 자유롭게 얘기하는 4명의 싱글 여성 주인공에게 비판이 쏟아졌다. 당시만 해도 텔레비전 쇼에서 ‘밝히는’ 여성은 악역이었고 주인공은 육체적 사랑을 추구해선 안 됐다.

“당장 금지돼야 한다. 저속해서가 아니라 짜증 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여성지 독자나 좋아할 자기 비하를 끊임없이 해댄다.”(더타임스)

“이 드라마는 30대 여성이 섹스에 집착하는 것처럼 묘사한다. 그런데 내가 아는 그 나이대 여성들은 그만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인디펜던트)

그런데 첫 에피소드가 방영되자 280만여 가구가 시청했고 시즌1의 평균 시청 가구는 690만여 개에 달했다. 2004년까지 계속된 드라마는 7번의 에미상, 8번의 골든글로브상을 수상했다. 2007년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은 최고의 텔레비전 시리즈로 꼽았다. 국내에도 ‘브런치’ 열풍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큰 반향을 낳았다.

과감한 스토리의 ‘섹스…’는 책에서 출발했다. 원작은 ‘뉴욕 옵서버’의 칼럼니스트 캔디스 부시넬이 2년 동안 쓴 글을 모은 동명의 에세이집. 한데 1명이 쓴 에세이보다 작가 여러 명이 협업해 만든 드라마가 새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쟁 관계로만 그려졌던 여성들의 끈끈한 우정과 그들의 욕망을 자유롭게 표출했다는 것이다.

칼럼을 메가 히트쇼로 만든 저력은 자유분방한 작가룸의 분위기였다. 대부분의 작가는 드라마 속 캐릭터처럼 싱글이었고, 스스로를 뉴욕의 아웃사이더로 여겼다. 이런 공감대 안에서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토론했다.

캐리가 싱글인 자신을 아니꼽게 보는 기혼 여성 친구에게 “나와 결혼하기로 했다”며 결혼 선물로 구두를 받아낸 에피소드도 경험의 산물. 당시 한 작가는 “나는 비싼 결혼 선물을 갖다 바치는데, 비싼 구두를 신는다고 싱글을 비꼬는 사람에게 한 방 날리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결혼해도 변화가 없을 것 같아 불안하다”는 캐리와 “안 맞으면 이혼하면 된다”는 사만다의 거침없는 대사도 실제 연애담에서 출발했다. 이전까지 결혼은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또 다른 작가 줄리 로텐버그를 비롯한 커리어 우먼들은 결혼에 회의를 느꼈다. 로텐버그가 오랫동안 만난 연인의 프러포즈를 거절한 아픈 경험은 동시대 여성들의 공감을 산 에피소드로 살아났다.

○ “신선함, 보편성 있으면 두려울 것 없어”

그동안 그의 지휘 아래 탄생한 미드 ‘로스트’, ‘식스’, ‘나이트폴: 신의 기사단’, 리얼리티 쇼 ‘전당포 사나이들’(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은 미국과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다. ABC·히스토리채널

조슨은 독창적인 신선함과 누구나 공감하는 보편성의 결합이 성공의 요소라고 강조했다. ‘섹스…’는 물론이고 ‘로스트’도 이 두 가지 요소를 갖췄다.

“인기 있는 인물이 중간에 죽는 설정은 드라마 역사상 ‘로스트’가 처음이었어요. 죽었던 인물을 플래시백으로 살려내 비밀을 드러내기도 했고요. ‘첫 시도’가 많았던 드라마입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 신선함이라면 생존을 향한 싸움은 보편성의 영역이다. 무인도라는 미지의 공간에 비행기가 불시착하고,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는 ‘캐스트 어웨이’ 등 영화는 물론이고 ‘로빈슨 크루소’ 같은 문학에도 나온 익숙한 내용이다.

조슨은 한 가족의 여정을 통해 미국 노예제도를 재조명한 드라마 ‘루츠’, 아프가니스탄으로 출동한 미 특수부대 최정예 요원들의 이야기를 그린 ‘식스’ 등 다른 작품에 대해서도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국제적 DNA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 여러 국가의 팬들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는 히스토리채널의 리얼리티쇼 ‘전당포 사나이들’은 라스베이거스가 배경이다. 화려한 라스베이거스 속 전당포라는 설정은 새롭다. 그러면서도 물건에 담긴 사연과 협상의 과정, 사업체를 운영하는 가족의 사연은 공감하기 쉬운 이야기다.

○ 당돌하게, 치열하게

조슨은 정글 같은 할리우드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하와이에서 대학을 나온 그는 1970년대 후반 로스앤젤레스에 왔다. 처음 6개월간은 경비의 눈을 피해 모든 제작사를 돌았다. 작가와 프로듀서의 사무실을 두드리며 이력서를 건네고, 우호적인 사람에게는 자신을 적극 홍보했다. 그러다가 한 프로듀서로부터 협업을 제안받으면서 할리우드에 입성했다. 직접 부딪치며 겪은 현장 경험이 그를 베테랑 제작자로 만들었다.

1996년 제작한 파일럿 프로그램 ‘디어 다이어리’는 ABC로부터 거절당했다. 어렵게 제작한 쇼를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해 다른 통로를 수소문했다. 결국 드림웍스에서 극장 배급을 결정했고, 1997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단편영화상을 수상했다. 여성 주인공의 생각을 내레이션으로 풀어낸 ‘디어 다이어리’의 형식은 1년 뒤 ‘섹스…’에서도 활용됐다.

“독창적이면서 보편적인 이야기가 왕”이라고 말하는 조슨은 한국도 참신한 콘텐츠와 풍부한 잠재력을 지닌 곳으로 보고 있었다.

“거대 플랫폼의 위협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변화에 대응하는 데는 더 좋은 이야기를 만드는 것으로 충분하니까요.”

LA=조윤경 yunique@donga.com / 김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