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이은화의 미술시간]〈24〉이것도 예술이야?

입력 | 2018-09-13 03:00:00


앤디 워홀, ‘흰 브릴로 상자들’, 1964년.

현대미술이 어렵게 느껴지는 건 이것이 정말 예술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들’도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외관상 이 조각들은 수세미 브랜드 ‘브릴로’의 포장상자와 똑같이 생겼다. 작품을 켜켜이 쌓아올려 전시한 모습도 슈퍼마켓에 진열된 상품의 모습과 똑같다. 상품을 베껴 만든 것이니 독창성도 없다. 그런데도 가치 있는 예술인 걸까?

상업미술가 출신의 워홀은 1964년 뉴욕에서의 첫 개인전 때 브릴로 상자들을 선보였다. 목수를 시켜 만든 나무상자 표면에 색을 칠한 후 실크스크린으로 상품 로고를 찍어 만든 것이었다. 전시 오프닝에 참석한 하객들은 브릴로 상자들을 보면서 비웃거나 환호하거나 즐겼다. 하객들 중엔 실제 브릴로 포장상자를 디자인한 제임스 하비도 있었다. 추상표현주의 화가지만 생계를 위해 프리랜서로 패키지 디자인 일을 하던 터였다. 자신이 디자인한 상자는 포장이라 가치가 없는 반면, 워홀의 상자에는 수백 달러짜리 가격표가 붙은 걸 보고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놀라긴 했지만 분노나 실망감은 없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하비도 워홀의 상자가 예술 작품이라고 전혀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명 비평가 아서 단토의 반응은 달랐다. 그는 브릴로 상자를 보고 ‘예술의 종말’을 고하며, ‘브릴로 상자’의 출현으로 이제는 예술을 판단할 때 시각이 아니라 사유, 즉 철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단토가 말한 ‘예술의 종말’은 심미적 즐거움을 추구하던 시대가 끝나고, 예술가가 부여한 의미가 중요한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뜻이었다.

브릴로 박스, 캠벨수프, 코카콜라, 유명 배우 등 친근하고 대중적인 소재를 최초로 미술의 대상으로 삼은 워홀은 이후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이자 20세기의 가장 성공한 예술가가 되었다. 2010년에는 그의 브릴로 상자 하나가 뉴욕 경매에 나와 300만 달러에 팔렸다. 이건 작품 가격이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혁신적인 생각과 그것을 구현한 워홀의 브랜드 가치였다.
 
이은화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