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집중의 빠른 투자 결정, 수십 년 축적에도 기술역량 부족 일본 강한 기술, 중국 강한 경영… 한국, 약한 기술-경영 어려움 더해 시행착오 쌓고 깊이 더해야 혁신
이정동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한국도 자주 방문한다. 한국에 대해서는 ‘약한 현장과 강한 경영’이라고 대조적으로 표현한다. 한국의 현장에는 축적된 기술이 없지만, 경영진의 투자 의사결정이 과감하고 빠르기 때문에 약한 기술의 단점을 커버하고도 남는다는 의미다. 일본 경영자들은 한국 경영자를 보고 좀 배우라는 뉘앙스다. 후지모토 교수는 2012년 ‘모노즈쿠리의 부활’이라는 책에서 바로 ‘강한 기술의 일본 산업’과 ‘강한 경영의 한국 산업’을 대조시키면서 일본 산업계에 경종을 울렸다.
한국 산업의 경쟁력에 대해 유사한 표현을 한 사람이 또 있다. 2012년 작고한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앨리스 암스덴 교수다. 후발산업국, 특히 한국 산업의 추격 과정을 학습의 개념으로 해석해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제도경제학자다. 암스덴은 한국이 1960년대 초보적인 생산 역량만 가진 상태에서 70, 80년대에 철강, 기계, 자동차, 전자, 화학산업처럼 고부가 산업 영역으로 빠르게 진입한 비밀을 설명하면서 강한 ‘투자 역량’이라는 표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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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덴과 후지모토는 한국 산업의 경쟁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각각 ‘투자 역량’과 ‘강한 경영’이라는 다른 표현으로 요약했지만 알고 보면 같은 의미다. 타당성을 빨리 분석해서 될성부른 분야를 잘 고르고 과감하게 투자해 단기간에 승부를 보는 역량이다.
한국 산업의 성장과 경쟁력의 비밀이라고 하니 칭찬 같기도 한데, 뭔가 좀 찜찜한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무엇보다 두 사람이 각각 책을 출판한 1989년과 2012년이라는 두 시점 간에 무려 20년 이상의 차이가 난다. 완전히 다른 수준의 한국 산업을 보았을 텐데 여전히 선택과 집중식 빠른 투자결정에 의존하고 있다는 지적이 가슴 뜨끔한 대목이다. 이 두 시점 간의 어디에선가는 투자 역량이 아니라 축적된 기술 역량 기반으로 옮겨갔어야 했다.
더 불편한 진실은 한국의 장점이라는 바로 이 투자 의사결정 역량에서 중국이 우리보다 동그라미 하나 더 붙인 정도로 과감하게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굴기는 말할 것도 없고, 5세대 통신망, 인공지능 등 미래 핵심 분야일 것 같은 곳에 모두 중국의 과감한 투자 역량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산업계는 투자할 돈이 없거나 지나치게 안전한 투자에 머물고 있고, 그마저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신산업 분야에는 더욱 주저하고 있다. 그래서 예전의 ‘강한 경영’은 더 이상 한국 산업의 장점이 아니다.
일본 산업은 약한 경영이라고 엄살을 떨었지만 소니, 후지, 캐논의 사례에서 보듯 결국 강한 기술의 힘으로 보란 듯이 부활하고 있다. 중국은 언제나 기술이 없는 듯 구걸하는 자세였지만, 지난 20년간 막강한 투자를 뒷받침하는 강한 경영으로 나날이 기술 역량을 더해 가고 있다. ‘일본의 강한 기술’과 ‘중국의 강한 경영’ 사이에서 한국은 약한 기술과 약한 경영으로 하루하루 어려움을 더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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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 집중식 단기성과주의로 대표되는 옛날식 ‘강한 경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파일럿 프로젝트를 더 많이 시도하고, 시행착오 경험을 꿋꿋이 쌓아가면서 한 우물의 깊이를 더해 가는 힘, 이것이 바로 혁신 주도의 시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강한 경영’의 진정한 모습이다.
이정동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