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성은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과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모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특히 그가 프로에 데뷔한 해인 2002년의 금메달은 여전히 각별하다. 미국프로농구(NBA)에서도 특급 센터였던 야오밍이 버틴 중국과 맞붙은 결승전은 한국농구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였다. 스포츠동아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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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마지막 날(10월 14일) 사직체육관에서는 한국과 중국이 맞붙은 남자농구 결승전이 열렸다. 예상은 중국의 우세였다. 당시 우리에게 만리장성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그런데 예상이 기분좋게 뒤집혔다. 언더독(이길 확률이 적은 팀)인 우리가 극적으로 이겼다.
중국을 무너뜨린 드라마는 이랬다. 정규시간 내내 뒤지다가 막판 무섭게 따라붙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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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우승은 선수들이 똘똘 뭉쳐 만들어낸 한편의 작품이었다. 특히 서장훈과 김주성은 미국프로농구(NBA) 휴스턴 로키츠에 1순위로 지명된 야오밍(226㎝)을 혼신의 힘으로 막아냈다.
김승현, 현주엽, 문경은, 전희철 등은 고비마다 결정적인 한방으로 힘을 보탰다. 홈팬들의 일방적인 응원도 한몫했다.
김주성(39)은 “우리는 4년 전인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결승에서 중국과 싸워서 졌다. 어떻게든 설욕이 필요했다. 하지만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쉽지 않았다. 다들 은메달 정도를 예상됐다.
그래서 모두들 지더라도 박빙의 승부를 하자고 다짐하고 경기에 들어갔다. 또 10점차 이내로 지는 걸 속으로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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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성은 “우리는 경기를 거듭할수록 자신감이 생겼다. 또 결국은 승리를 향한 의지가 중국보다 강했다. 그게 우승 비결이다”고 했다. 이어 “믿기지 않는 승리에 선수들은 모두 가슴 벅찼다. 다들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금 생각해도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에겐 부산아시안게임이 첫 번째 국제대회 우승이었다. 이후 12년 뒤인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도 정상을 밟았다. 2002년과 2014년 아시안게임에서 모두 우승을 경험한 남자농구 선수는 김주성이 유일하다.
동아고와 중앙대를 졸업하고 2002~2003시즌 국내 프로농구(KBL)에 데뷔한 김주성은 큰 키(205㎝)를 이용한 높이와 탄력, 그리고 지능적인 플레이로 프로무대에서도 승승장구했다. 또 16시즌 동안 ‘원클럽 맨’으로 뛰었다. TG삼보~동부~DB로 구단 명칭만 바뀌었을 뿐, 그가 뛴 홈 코트는 똑 같았다. 아울러 정규리그 5회, 챔피언결정전 3회 우승했고, 신인상(2002~2003), 정규리그 MVP 2회, 챔피언결정전 MVP 2회 등 선수로 뛰는 동안 각종 상을 휩쓸었다. 16년간 이룬 수많은 우승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우승을 물었다. 그는 주저 없이 2002~2003시즌을 꼽았다.
김주성은 “사실 아시안게임 출전 때문에 팀 훈련을 1주일 정도 밖에 하지 못했다”면서 “그런 상황에서도 데뷔 첫 해에 우승한 것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고 했다. 그는 당시 팀 선배인 허재(현 농구대표팀 감독)가 현역 은퇴를 앞두고 있어서 후배들이 힘을 많이 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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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우승도 부산아시안게임과 비슷했다는 게 김주성의 설명이다. “챔프전 결승 상대는 동양 오리온스였는데, 멤버가 화려했다. 외국인 선수 힉스를 비롯해 김승현, 김병철 등 최고의 선수들로 구성됐다. 챔프전이 열리기 전 예상은 우리가 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예상을 보기 좋게 뒤집었다. 그래서 더 짜릿했다.” TG삼보는 챔프전(7전4선승제)에서 4승2패를 기록하며 창단 후 처음으로 정상에 올랐다.
한편 2017~2018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김주성은 조만간 미국으로 연수를 떠난다. 1년 정도 현장을 돌며 선진 농구를 배울 예정이다.
최현길 전문기자 choihg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