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최인훈 1934∼2018] 대학 새내기들에게 삶과 예술을 일깨워주시고 산수연날 찾아온 제자들 두 손 꼭 잡아주신 선생님 그 따스함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윤지훈 사진작가 제공
1980년대 말 남산의 서울예대 교실 풍경은 카오스 그 자체였다. 전국에서 글 좀 쓰겠다고 모여든 학생들은 87년 항쟁의 기운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교실에서 시위 현장인 명동으로 나가고 싶어 늘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지금이었다면 최인훈 선생님의 강의를 좀 알아들었겠지만 그때 나는 선생님의 강의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선생님과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고 과제를 내주시면 며칠씩 밤을 새워야 해낼 수 있었다.
선생님의 말씀은 그대로 옮겨 적어도 문법적으로나 논리로나 오류가 없는 문장이 될 정도로 완벽했는데, 그런 분이 봤을 때 우리의 산문이란 얼마나 부족했을까. 최인훈이란 분이 두 다리로 캠퍼스를 걸어 지나다닌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을 받곤 했던 때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늘 우리에게 예술적 주체를 강조하셨고, 다른 자리가 아닌 예술가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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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중국과 북한의 국경 지대인 투먼(圖們)에 갔을 때, 거기서 최인훈 선생님을 생각했다. 회령시가 한눈에 보이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우리보다 앞선 세대 분들의 삶이란 늘 경외하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누가 그렇게 치열하게 살고 쓸 수 있을까.
선생님께서는 그 무엇에도 자기 자신을 쉽게 내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최인훈 선생님을 존경한다. 사는 일도 그렇지만 쓰는 일에도 지름길이란 없다. 선생님은 늘 사유하면서 자기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남산에서 처음 만난 완벽한 예술가 최인훈 선생님, 선생님을 어떻게 모셔야 할지 몰라 늘 마음만 졸였지만 선생님은 영원히 내게 단 한 명의 완벽한 예술가이시다. 팔순 잔치에서 직접 들었던 선생님의 소설 ‘바다의 편지’ 낭송을 떠올리며 마지막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최인훈 선생님께서 돌아가시다니, 한 시대가 저무는 느낌이다.
소설가 강영숙(고 최인훈 작가의 제자)